시집에서 읽은 시

새롭게 빛나는 저녁 외 1편/ 윤석호

검지 정숙자 2020. 1. 30. 00:25



    새롭게 빛나는 저녁  1편


    윤석호



  빛을 섞으면 환해집니다

  하늘의 것이니까요

  색을 섞으면 까매집니다

  땅의 것이니까요

  빛은 하늘로 와서 색을 만들어내지만

  아무리 색을 뭉쳐도 빛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모래를 뭉쳐도 모양이 될 수 없듯이

  한 번 흩어진 마음은 아무리 뭉쳐도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이으면 영원이 됩니다

  하지만 기억들을 불러 모으면

  고스란히 아픔만 남습니다

  소중한 것은 쉽게 깨지고

  그 가장자리는 왜 그리 날카로운지

  그래도

  아파했던 그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원에 닿아 있었지요

  영원은

  길이가 아니라 깊이니까요


  해가 방금 지고

  거리의 불빛이

  새롭게 빝나는 저녁입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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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티다 무너지는 것들에 대하여




  버틴다는 말을

  무너졌다는 말로 결말지을 수 있나 

  꽃 피면 할 수 없이

  화려함으로 버텨야 하고

  새들도 한 음절의 노래로

  하늘을 버티며 날아간다

  쭈그러진 아버지가

  홀로 누워 생을 버티는 동안

  아버지의 구두는 허기로 벌어진 입을

  적막으로 버티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버틴다는 동사의 목적어를 물어볼 수 있나


  막 떨어진 낙엽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곱고 섬세한 잎들도

  때가 되면 가지를 놔준다

  목련도 미련처럼 보이기 전에

  스스로 꽃의 목을 자른다

  사랑조차도

  견디는 일이란 것을 알아차린 듯

  어둠 속 별 하나

  스스로를 화장하며 별똥별로 지고 있다


  버티던 것들만 무너질 수 있다

  세상의 하루를 담담히 버텨 내고

  해가 벌겋게 서쪽으로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장소가 지워진 기억 몇 개만

  차갑게 밤하늘에 남을 것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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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4인칭에 관하여』에서/ 2020. 2. 1. <시산맥사> 펴냄

  * 윤석호/ 2014년《부산일보》신춘문예 & 2011년 미주 중앙 신인문학상 당선, 2010년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상, 2008년 캐나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상, 시마을 동인, 문협 미국 워싱턴주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