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함정 외 1편
이명
벗어나는 길은 빠져드는 길 뿐이다
선암사 선방 출입문 앞, 수사마귀가 나타나자 암사마귀가 기어코 길을 가로 막는다 눈빛이 심상치 않다 수사마귀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던 암사마귀, 배를 슬슬 흔든다 암내를 풍기고 있다 선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수사마귀의 행동이 궁금하다 돌아보니 암사마귀의 등으로 기어오른다 간혹 거친 숨소리만 뱉어낼 뿐 한동안 선을 수행한다 일체의 흔들림이 없다 후대를 위한 자비가 깊이 모를 적막으로 흘러들 순간, 암놈이 앞발을 치켜든다 수사마귀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와지직, 머리부터 씹어 돌리는 턱 사이로 바람이 서걱서걱 잘려나간다 초록 변신이 들키자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리며 힐끗, 나를 쳐다본다 더듬이 하나 삐쭉이 턱 끝에 걸려있다 허공이 된 수사마귀의 보시, 조주의 함정에 몰두하던 나는 더욱 깊은 함정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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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에 내리는 눈
눈이 춤을 춥니다
혜화역 1번 출구, 낙산빌라 오르는 길
내리던 함박눈이 다시 공중으로 치솟아 오릅니다
옆으로 사뿐히 날아가는가 했더니
배회하듯 돌아서며 다시 솟구치는 휘몰이장단의 영혼,
21g의 노명순입니다
나지막한 빌딩과
굽어있는 골목이 배경인
걸개그림 한 장 걸어두고 치렁치렁,
온몸에 무명천을 두른 채 춤을 추고 있습니다
중중모리에서 세마치로
세마치에서 다시 휘몰이로
굽이치는 버선코가 서천西天에서 날렵한데
그 곁, 마음 심心 모양 소나무 굵은 가지에
박승미는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습니다
초록 머플러에 너트 털모자를 쓰고
보오얀 방석을 깔고 앉아
한바탕 흐드러지는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모습 그대로
저 세상이 밝아 이 세상이 하얀,
저, 춤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나는
무대 뒤에서 마지막 멘트를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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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박호순미장원』에서/ 2020. 1. 22. <시선사> 펴냄
* 이명/ 2010년『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2011년《불교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앵무새 학당』『벌레 문법』등, 2018년 e북 『초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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