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사랑서사시 제9장
-흥덕왕릉 편
이령
통일신라의 능원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피장자가 정확히 밝혀진 왕릉이다. 정목왕후와 합장할 것을 유언한 응덕왕에 의해 합장릉이라 붕분의 크기도 동시대의 왕릉보다 크다. 사람의 크기가 왕릉의 크기로 내려앉은 곳, 서역인상의 무인석상과 빼곡한 소나무 숲이 무덤을 지키고 서 있다.
1
짚대를 타고 내리는 빗물은 서두르지 않는다
또로록 또로록 줄 서서 내리는 낙수
나직이 흐느끼는 속울음처럼
면역이 없는 그리움, 사랑이 천년의 봉분을 타고
저리 오래도록 깊고 서럽게 흐른다.
2
합장된 것은 몸 아닌, 마음이었다.
아라비아 푸른 눈을 베껴
한 발 아래 뛰어내리지 못해 한 발 위에서 우는 여인아
비가悲歌에 젖은 처용무처럼 자못 흔들리는
귀부의 몸돌 난간에 핀 저 제비꽃
덕이 흥하면 천국이요, 사랑이 사라지면 지옥이라지.
사랑이 움트는 일은 꽃이 피는 일.
철 지난 말의 개화다, 왕릉이 일어선다.
산 그림자 눕는 숲, 솔잎 침낭 들추며 나온 저 제비꽃
합장된 것은 금관이 아닌 한 사내의 순정이었다.
3
적막이 하도 좋아 나 그 적막에 들었네.
비雨, 땅에 떨어지기까지 꿈이었네.
사랑은 꿈꾸는 자들의 눈물.
비悲, 터진 비명은 더 이상 꿈이 아니네.
사랑은 살아있는 자들의 비상,
비飛, 한 잔 술에 취해 슬픔을 말리며 하늘을 나네.
사랑은 꿈에서 깬 신들의 눈물.
적막이 좋아 적막애 드니 나를 취하게 한 그 적막, 사랑이었네.
4
비 그치자 달이 머리 위로 솟는다. 가래톳 돋는 밤꽃 향 분분하다. 천년 면벽에 돌부처도 벌떡 일어나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밤. 무덤이 열리고 엎드려있던 자라가 기지개를 켜는 금오산, 신검의 부활인가? 산이 품은 그리움, 휙휙 휘리릭 귀신 새소리마저 구슬프다.
5
세상 꼴딱 모르고 지나치고 말 발걸음을
귀신 소리가 불러 세워 밤이 하얗다
밤물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목청
처음에는 낮은 속울음이었을 산이 품은 그리움
무덤을 싸안은 적막의 세월들이 소리를 높이게 했던가 보다
그리움에는 면역이 없어
발자국들이 점이 될 때까지
새는 부리에 허공을 달았을까
바람의 입을 빌린 나뭇잎, 밤마다 곡성에 쫓겨 사그락거리고
나는 산중을 헤매는 꿈을 꾼다
내 닿는 길마다 달빛 들어 마음의 그물을 깁고
비명의 시간들 차분히 목청 내려놓으면
귀신 새가 무덤가에서만 우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만 같다.
* 시집『삼국유사 대서사시/ 사랑 편』에서/ 2020. 1. 1. <한국문화관광콘텐츠협의회> 펴냄
* 이령/ 1974년 경북 경주 출생, 2013년『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 시집『시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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