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칭에 관하여
윤석호
영화가 시작된다.
1인칭과 2인칭, 착하거나 못된 3인칭들
나머지는 배경이거나 세트거나 이름도 없고
상관도 없는 잡다한 것들, 4인칭이다
아무도 나에게 무례한 적 없다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구다
옷장이면서도 옷 한 번 배불리 품은 적 없다
나는 행인이다
하지만 한 번도 갈 길을 간 적이 없다
거리에서, 편의점에서 사람들의 무표정은
배역을 받지 못해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는 다시 1인칭이다
내 곁에는 2인칭도, 3인칭도 없다
그들은 각자의 방문 안에서 1인칭으로 살고 있다
나에게 그들은 4인칭이다 그들에게 나도 그렇다
문을 열고 입을 열면 저절로 인칭이 생기겠지만
4인칭끼리 말을 섞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 밤이면 마음속에 구덩이를 파고
참았던 것들을 깊게 묻는다
외로운 별이지만 아무 떄나 빛날 수 없다
바람 분다고 누구 앞에서나 몸을 뒤집고
속을 보일 수도 없다
4인칭은
장르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은 작은 배가 거센 파도에 휩쓸리듯 큰 흐름 속에 이리저리 흔들렸을 격변의 시대와 이민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지나왔다. (……) 결국, 시인은 고통받는 영혼을 위해 1인칭인 자신을 별것 아닌 '배경'에 불과한 '4인칭으로 역치시킨다. 이는 감정을 객관화시켜 자기의 감정에 거리를 두는 효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4인칭'은 "또 다른 1인칭"으로서 변신을 시도해 씨앗이 되고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바람이 되어 그 대상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하자면 '잡다한 것'에 불과한 '4인칭'은 변신을 꿈꾼다. '배경'에 불과한 자신은 카프카의 <변신>처럼 곧 새로운 자아가 된다. (p. 시 92/ 론 127 (…) 128) (이주화/ 시애틀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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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4인칭에 관하여』에서/ 2020. 2. 1. <시산맥사> 펴냄
* 윤석호/ 2014년《부산일보》신춘문예 & 2011년 미주 중앙 신인문학상 당선, 2010년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상, 2008년 캐나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상, 시마을 동인, 문협 미국 워싱턴주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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