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순간 외 1편
- 정괘井卦
이영신
그리스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인
크로노스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란다
카이로스는 잡아야 하는 기회란다
크로아티아 트로기르 섬
골목에서 마주친 것이 카이로스에 틀링없었다
앞머리털이 수북하여 눈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양발에 날개가 달린 것을 보니 카이로스에 틀림없었다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던 카이로스의 옆구리를 채어잡고
머리털 한줌을 뽑아서 내 손안에 움켜쥐었을 때
카이로스는 이미 흔적도 없이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워낙 세게 잡아채어 살비듬이 약간 묻어났다
나는 지금도 그 행운의 머리카락을
마르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물도 뿌려주며
잘 갈무리하고 있다.
-전문-
-----------------------
페라스트, 어린 신부
- 환괘渙卦
발칸은 녹색의, 푸른 초록 숲이란 뜻,
그곳 한 자그마한 섬에 가면
한 남자를 기다리는 머리칼이 허옇게
세어버린 여자가 있다고 한다
새댁의 머리칼 한 올 한 올 가다듬어
천사의 머리카락으로 수놓으며
기다리던 여자가 있다고 한다
바늘 한 땀 속에 봄이 흐르고
바늘귀 속을 지나 가을도 지나가더니
언젠가부터는 하늘이 바다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이더니
천사의 머리칼도 하얗게 물들이고는
바라보고만 있다고 한다
발칸 페라스트 섬에 가면
초록재 다홍재로 녹아내린 채
아직도 남자를 기다리는
서정주의 어린 신부를 닮은 여자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전문-
--------------
* 시집『오방색, 주역 시』에서/ 2020. 1. 15. <문학아카데미> 펴냄
* 이영신/ 1991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죽청리 흰 염소』『천장지구』등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인칭에 관하여/ 윤석호 (0) | 2020.01.29 |
|---|---|
| 삼국유사 사랑서사시 제9장_ 흥덕왕릉 편/ 이령 (0) | 2020.01.24 |
| 봄몸살_해괘(解卦)/ 이영신 (0) | 2020.01.18 |
| 논둑의 지형도 외 1편/ 이서화 (0) | 2020.01.18 |
| 배추밭/ 이서화 (0) | 2020.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