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행운의 순간_ 정괘(井卦) 외 1편/ 이영신

검지 정숙자 2020. 1. 18. 12:49

 

 

    행운의 순간 외 1편

    - 정괘井卦

 

    이영신

 

 

  그리스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인

  크로노스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란다

  카이로스는 잡아야 하는 기회란다

 

  크로아티아 트로기르 섬

  골목에서 마주친 것이 카이로스에 틀링없었다

  앞머리털이 수북하여 눈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양발에 날개가 달린 것을 보니 카이로스에 틀림없었다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던 카이로스의 옆구리를 채어잡고

  머리털  한줌을 뽑아서 내 손안에 움켜쥐었을 때

  카이로스는 이미 흔적도 없이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워낙 세게 잡아채어 살비듬이 약간 묻어났다

 

  나는 지금도 그 행운의 머리카락을

  마르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물도 뿌려주며

  잘 갈무리하고 있다.

    -전문-

 

 

   -----------------------

   페라스트, 어린 신부

    - 환괘渙卦

 

 

  발칸은 녹색의, 푸른 초록 숲이란 뜻,

  그곳 한 자그마한 섬에 가면

  한 남자를 기다리는 머리칼이 허옇게

  세어버린 여자가 있다고 한다

 

  새댁의 머리칼 한 올 한 올 가다듬어

  천사의 머리카락으로 수놓으며

  기다리던 여자가 있다고 한다

 

  바늘 한 땀 속에 봄이 흐르고

  바늘귀 속을 지나 가을도 지나가더니

  언젠가부터는 하늘이 바다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이더니

  천사의 머리칼도 하얗게 물들이고는

  바라보고만 있다고 한다

 

  발칸 페라스트 섬에 가면

  초록재 다홍재로 녹아내린 채

  아직도 남자를 기다리는

  서정주의 어린 신부를 닮은 여자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전문-

 

   --------------

  * 시집『오방색, 주역 시』에서/ 2020. 1. 15. <문학아카데미> 펴냄

  * 이영신/ 1991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죽청리 흰 염소』『천장지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