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몸살
-해괘解卦
이영신
대한이 물러가고 입춘 지나
우수쯤이면
양산 통도사 영각影閣 앞엔 350살도 더 먹은
자장慈藏 매화가 만발한다
선홍빛 꽃천지이다
꽃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어지간히 경륜이 쌓인 자장매화는 사람 얼굴 가릴세라
삭정이 가지 슬그머니 밀어내며
옆으로 살짝 각도를 잡아준다
지나가며 구경하던 바람도 전각 처마의 풍경소리를
슬쩍 밀어넣어 배경으로 받쳐준다
드넓은 경내 어디 법당에 매달려 있는
악착齷齪 보살도 이때쯤이면 봄몸살에 싱숭생숭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의 앵글은 양산 통도사에 초점을 맞춘다. 통도사에는 역대 대종사들을 모셔놓은 영각 앞에 홍매화 한 그루가 있어서 입춘 지나면 선홍의 매화가 꽃다발처럼 피어나서 전국의 상춘객들을 끌어온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인 1650년 무렵에 통도사의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신라시대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진다. 그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스님의 지계 정신을 표현한다 해서 자장매화慈藏梅花란 이름까지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자장매화의 특이한 이름이나 내력에는 별 관심이 없다. 봄이 오면 얼어붙었던 땅이며 물이 풀리는 해동의 봄바람에 온천지가 몸살을 앓는다. 시인은 이 무렵을 대표하는 자장매화가 선홍빛 꽃천지를 이룰 적으로 곧장 시점을 이동한다. 자장매화에 앵글을 맞추되 여느 시인과 달리 매화의 예의바른 센스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이 자장매화 앞에서 "꽃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진이라도 찍을" 때면 "어지간히 경륜이 쌓인 자장매화는" 꽃너울 넘치는 가지들이 "사람 얼굴 가릴세라/ 삭정이 가지 슬그머니 밀어내며/ 옆으로 살짝 각도를 잡아준다"고 서술한다. 하도 능청스러워서 사실을 따질 겨를도 없다. 그리고 이때는 서슴없이 그곳을 "지나가며 구경하던 바람도 전각 처마의 풍경소리를/ 슬쩍 밀어넣어 배경으로 받쳐준다"고 말한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이 동네의 매화며 바람은 착하기 착이 없는 친구들이다./ 뿐만 아니라 "악착齷齪보살도 이때쯤이면 봄몸살에 싱숭생숭/ 엉덩이를 들썩거린다."니 참으로 놓치기 어려운 풍경이다. 정식 불교 경전에는 나오지 않는 악착보살은 이를 앙다물었다는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우악스러운 이름과 달리 전력을 다해 부처님의 반야용선(법당)에 매달려가는 천진보살이다. 사찰을 뜻하는 반야용선은 청정보살들을 극락정토로 태워가는 배로서 어느 땐가 배를 미처 못탄 보살 하나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끝까지 따라갔다는 전설에서 유래된다. 이 때문에 악착보살을 다룬 우리나라 3개 사찰에서도 악착보살은 법당의 불화가 아니라 처마 밑 같은 곳에 매달린 상태로 그려진다.(p.94-95) (박제천)
『주역』은 점 보는 책이나 명리학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주역』을 공부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주역』은 생활의 지혜가 담긴 잠언서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명중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음양의 조화를 통해 지혜를 비유로 암시해 주고, 그 속에서 삶의 은유와 상징을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이영신의 이러한 시 창작적 모험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p.105-106) (유한근)
위의 시는 봄꽃인 '자장매화'가 만발한 통도사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정다운 교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연에 나오는 '악착보살'은 이 시의 눈이다. 두루 알다시피 악착보살은 차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길을 건네주는 반야용선에 타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리는 동자를 일컫는다. 수행의 길은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으며 그저 습관의 세계에 안주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악착보살은 그 길이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빠짐을 너무도 잘 알기에 젖먹던 힘을 다하여 수행의 끈을 놓지 않는다. 화자는 그 악착보살조차도 봄의 분위기에 들떠서 마음이 흔들려 "엉덩이를 들썩거린다"고 함으로써 시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부제인 해괘解卦의 괘사 또한 시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데, 괘사의 내용을 보면, "하층부는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고 상층부에서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국면이 조금씩 해결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어 시의 분위기와 어우러지고 있다.(p.126-127) (고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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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오방색, 주역 시』에서/ 2020. 1. 15. <문학아카데미> 펴냄
* 이영신/ 1991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망미리에서』『저 별들의 시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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