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시
박영녀
그가 내 시를 훔쳤네
러시아 자작나무
보드카 한 잔에 황홀해진 자작나무
종일토록 흔들리다 나에게 건네준 시
자작자작 그 바람 소리 들어보라고
그에게 읽어주었더니
그만, 날름 받아 삼켜버렸네
아, 문예지를 받아보니
그 시가 거기에 실려 있네
도둑맞은 시
아르바트 거리에 찬비만 내리고
빅토르 최는 보이지 않네
숨이 막혀 도둑이야! 소리칠 수도 없어
왜 그랬냐고 넌지시 따져 물었더니
그는 비열한 작태作態로
이런 게 바로 객관적 서술이라나?
울컥, 시퍼런 욕설이 쏟아졌지만
그래, 까짓것 너나 가져라!
이미 도둑맞은 시는
시가 아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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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비가 내린다
개미 한 마리 지하방으로 들어간다
헐거워진 허리띠를 풀어
젖은 더듬이를 내려놓는다
책상 위에 뿌옇게 흩어진 말들을 주워 모아
허기를 채운다
통장의 잔액처럼
끊어졌다 이어지는 문장들
개미 발끝으로 찍어내는 무늬
개미 허리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시는 언제쯤 올까
비가 쏟아진다
불빛에 걸린 동그라미를 끌어내려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남의 삶을 읽어도 미끄러진다
자판에서 바닥을 치며
튀어 오르는 자음과 모음
빗방울이 바닥을 친다
창문에 낙서를 하며 이내 지워진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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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아이스께끼』에서/ 2019. 12. 5. <한국문연> 펴냄
* 박영녀/ 2015년『시에』로 등단, 공저『프로방스에 끼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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