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의 왕자
양균원
1
드라이 기운이 풀리자
갓 자른 앞머리가 일렬로 늘어졌다
3식이 아니랄까 봐,
아내가 도끼눈을 뜬다
(곰탱이는 지 몸에 양식을 저장하고
잠이나 퍼잔다는데)
이빨도 안 닦고 몽유하는 불순분자
야밤에 또 냉장고 문을 열고 있다
일 없는 나날의 밥알을
삼키고 씹고 넘기고
집밥은 먹을수록 든든해지지만
시간은 넘길수록 헛헛해진다
어디 좋은 맛집 좀 찾아봐요
아내가 왈왈(종간나 새끼,
인민의 총알 세례를 받아도 싸다)
다시 온 월요일, 오늘 따라
매운맛 라면에 총각무가 왜 이리 당기는지
훈김이 서렸다 사라지고
안경 벗을 새도 없이 국물이 바닥나고
2
후덥지근한 여름
입맛 잃은 식사를 대강 마치고
과일 후식이 나왔는데
딸아이가 불쑥,
"시가 없어 좋군!"
씨알도 안 먹히는 실험시와
온종일 씨름하던 나는
일격에 어안이 벙벙한데
갈치 뼈 모아 둔 식탁 모퉁이로
탁, 거봉 껍질을 뱉어 내고 있는
내 강아지, 껌 좀 씹어 본 티를 내는데
노후 대책이래야 서방이 전부인 아내마저
"3식 씨 , 운동이나 나가셔"
딴전 피우자 곧이어 날아오는
"아이, 씨이 "
씨가 자꾸 시가 되어
구석마다 돌아다니는 저물녘에서
배가 더부룩해지고 있는데
3
누가 집안의 지존인지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있으나
왕좌의 게임은 싱겁게 끝나지요
집에는 여왕이 있소이다
제가 그 옆의 공작公爵이냐구요?
그래도 좋을 듯싶지만
여러분 각자의 인생에 비추어 아시는 대로
가끔은 진공청소기 돌리는 시종이고
가끔은 슈퍼에서 마트로
원격 조정당하는 심부름꾼인 거죠
잠정 결론은 눈치껏 왕자랍니다
보위에 오를 기회가 영원히 없는
늙은 맏아들 말입니다
그래 집밥의 왕자가 납시었나이다
페르시아 왕자는 양탄자를 타고
공주를 구하러 가지만
시도 때도 없이 심드렁해지는 내 버르장머리는
책상 밑 러그 조각에 발바닥을 부비면서
혹시 오늘은 나 대신에 마누라가
(내 속으론 여전히 내 거시기니까
저것 먼지라도 털어 주려나
기대하고 있나이다
4
바다 끝에
낭떠러지 폭포가 있다
뭐, 그런다 치고
머릿속 북소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수심,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곳에 있다
파도에 씻겨
희고 단단하고 매끄럽게
내 뼈가 해안에 얹히는 즈음
그건 얼마나 깊이 가라앉고 있을까
혹자는 사라진다고
잊힌다고
빗소리의 주문이 저토록 무효하게 뭔가를 소환하는 것은
어떤 이야기도 기록되지 않은 심처에서
육신 없는 목소리가 떠돌고 있는 탓이 아닐까
주기율 원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의 제물을 기다리는 탓이 아닐까
양성의 테레시아스여,
아직 산 자인 나에게 죽은 자의 가르침을 다오
묵은 아내가 자정 넘어 잠복해 있는
네 귀가 닳은 4인용 식탁으로
몸성히 돌아갈 수 있게
5
새가
따라오고 있다
저이가 모습을 보이는
얼핏, 혹은
소리만 남은 날갯짓에서
오늘 살아야 할 이유가
구성되고 있다
1년은 365일
하루는 세끼이고
한 끼는 씻고 안치고 끓이고 먹고 씻는
명료한 아젠다
그걸 세 번 하여 완성되는 3식 씨가 있고
내가 알기로는, 이제
환원주의자의 인생이다
어제 남긴 삶은 감자 두 톨로
1식을 때우고
아침 맞이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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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집밥의 왕자』에서/ 2020. 1. 20. <파란> 펴냄
* 양균원/ 1960년 전남 담양 출생, 1981년《광주일보》& 2004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허공에 줄을 긋다』『딱따구리에게는 두통이 없다』, 연구서『1990년대 미국 시의 경향』『욕망의 고삐를 늦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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