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시간을 굴리다
송연숙
달팽이가 지나간 배춧잎은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문양은 느린 시간의 발자국, 무형의 무늬 속으로 늦여름이 빠져 나간다 사각사각 초침들이 배추 이파리를 지날 때 점액질 흰 달은 둥글게 살이 찐다 여름의 막바지들이 겹겹으로 들어차고 막바지에 다다른 파란을 달팽이가 갉아 먹는다 파란의 흉터는 공중의 숨구멍
모든 흉터는 파란이 파란波瀾을 겪으며 걸어온 흔적이다
달팽이가 지나온 흔적 너머로 늙은 개가 하품을 하고 밀잠자리들이 고춧대 끝에서 구름의 전파를 잡는다 알밤이 툭툭 가을을 세고 수수열매 자루들마다 공중을 쓸고 있다
지금은
배추들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풀벌레 소리가 배춧잎으로 스며드는 시간
햇살과 바람의 끝자락이 알곡처럼 자루에 담기는 시간
오른돌이바람이 천천히 공중의 시간을 돌리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달팽이는 배춧잎을 먹고, 달팽이가 가는 "느린 시간"을 따라 배춧잎의 존재는 사라진다. 하나가 살이 찔 때, 다른 것은 없어진다. 하나의 "흉터"가 다른 것에게는 "숨구멍"이 되는 이 배리背理야말로 세계의 구성 원리이다. 삶과 죽음의 이 동시적 '겹침'이 세계의 문법이다. 세계는 이런 "흔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원리이므로,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 끔찍한 배리에 대해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늙은 개"는 "하품을 하고", "밀잠자리들"은 "고춧대 끝에서 구름의 전파"를 잡고, 이 느린 시간의 언덕에서 "알밤이 툭툭" 떨어진다. 시인은, 이러므로 세상이 괴롭다거나, 이러니 인생은 그 자체 고통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일체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세계의 문법은 그 자체 의지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논평이 불필요해진다. 이것이 송연숙 시인이 가지고 있는 평강 아닌 평강이다. 누군들 이 배리를 쉽게 받아들이리. 그러나 세계는 세계일 뿐, 주체는 세계의 대大문법을 거부할 수 없다.(p.127)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
* 시집『측백나무 울타리』에서/ 2019. 8. 15. <시와표현> 펴냄
* 송연숙/ 강원도 춘천 출생, 2016년『시와표현』으로 등단, 2019년《강원일보》신춘문예 &《국민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발견/ 양균원 (0) | 2020.01.15 |
|---|---|
| 거울과 가로수 외 1편/ 송연숙 (0) | 2020.01.14 |
| 출구, 출구 없음 외 1편/ 정영숙 (0) | 2020.01.13 |
| 아무르Amur, 완전한 사랑/ 정영숙 (0) | 2020.01.13 |
| 나무와 쇠 외 1편/ 이학성 (0) | 2020.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