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출구, 출구 없음 외 1편/ 정영숙

검지 정숙자 2020. 1. 13. 15:46

 

 

    출구, 출구 없음 외 1편

   

    정영숙

 

  누군가가 예술가란 사실은 그가 온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떠맡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 루이스 부르조아

 

 

  어머니 이제 내 몸은 사라지고 사다리만 남았어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딛고 올라오세요

 

  어느새 여덟 계단을 올라오셨군요

 

  이제 한 계단만 더 올라오세요

 

  내가 앉아 있는 여기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으니

 

  마음 편하실 거예요

 

  이곳은 고통도 희망도 없고 허기도 지지 않는

 

  아주 편안한 곳이에요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요

 

  그 분도 오래전에 이 꼭대기를 밟고 지나갔을 거예요

 

  이제사 나는 공기처럼 가벼워지네요

 

  (그녀는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아홉 개의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는 <루이스 부르조아>의 사다리가 되어 오래도록 지상에 서 있을 것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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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꺾임의 미학    

 

 

  부석사에 오르려면 안양문부터 길이 꺾인다 축이 꺾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 천왕문에서 요사체, 요사체에서 범종각을 거쳐온 직선의 똑바른 길을 벗어나야만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오를 수가 있다 무량수전의 전면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날들, 앞만 내다보며 앞으로 난 직선의 길만 꼿꼿이 걸어온 날들, 조금의 구부러짐도 조금의 뒤틀림도 허용치 않았던 나의 길 사물의 옆면만 보았을 뿐,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이제 여기쯤에서 꺾어져야겠다 지금까지 걸어온 직선의 길을 버리고 휘어진 길로 접어들어야겠다 내가 꺾이고 나니 부석사 발 아래로 보이는 지붕들이 모두 날개를 단 듯하다 소백산맥 준봉 위를 날아오르는 나를 향해, 무량수전을 지키는 석탑이 불을 켠다 사방정토를 향해 길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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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아무르, 완전한 사랑』에서/ 2019. 12. 25. <시월> 펴냄

  * 정영숙/ 1947년 경북 대구 출생, 1993년 시집『숲은 그대를 부르리』로 작품 활동, 시집『물 속의 사원』『황금 서랍 읽는 법』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