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해무/ 김양희

검지 정숙자 2020. 1. 10. 23:44

 

 

    해무

    - 나의 구린새끼 골목* 6

 

    김양희

 

 

  해무가 진하게 피어오를 때 뱃사람들은

  바다에서 비파 소리를 듣는다

  현의 파동은 해저 깊이 어디쯤에서 공명을 일으키는지

  번짐의 농도에 따라 해무의 음계가 감지되었다

  해무는 바다 어디에서든 꽃숭어리처럼 피어났다

  들끓는 적도의 바다 위로 뜨거운 태양이 부서져 내리고

  북극 어디쯤 시베리아 쇄빙선이 얼음을 가르며 지날 때

  시작점도 끝점도 알 수 없는 해무의 무리들이

  이미 해안의 배들을 포획하고

  거대한 상륙의 닻을 순식간에 내렸다

  방파제가 사라지고 부두마저 해무의 무게로 가라앉고

  속수무책 길을 잃어가는 해안가 마을마다

  저녁 불빛이 하나 둘 희미하게 길을 열어 놓으면

  겁 없는 섬 처녀들은 축축이 젖은 머리 풀어헤치고

  육지 어디든 해무에 실려가길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흘러가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진압의 악력에, 기다림의 저항만이 무위無違하다는 것을

  바다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해무에 갇혀 사는 인생들만이 헛발질하다

  주저앉아 죽음을 미화할 뿐

  땅을 밟고 싶은 바다의 혼령들마저

  도선의 밧줄을 던지다 헛되이 되돌아가고

  죽음 몇 끌어안은 해변이

  해무가 휩쓸고 간 뒤끝에 앉아 꽃 진 바다를 바라봤다

    -전문, p-46.

 

 

 

   * 서귀포시 서귀동 정방로 이중섭 거리 주변으로 샛길 골목들이 많았다. 정방동 책자에는 하수시설이 없을 당시 비가 오면 빗물과 오물이 넘쳐나 구린샛길이라 했던 것이 발음 그대로 고착화 되었다고 함. 서귀포문화원 향토학자들은 어원은 '굴이 있는 샛길'인데 연음화 과정을 거쳐 구린새끼가 되었을 거라 추정함.(p-38)

 

 

   해설> 한 문장: 이 시에는 제주도의 과거와 현재가, 제주도민들의 삶과 꿈이 오롯이 담겨 있다. 태풍만 해도 1년에 몇 차례씩 엄습하는 섬인데 이 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김양희 시인은 제주도 출신 시인으로서 목 놓아 노래 부르고 있다. 흡사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려 밤새 무가를 부르는 심방처럼, 해무가 진하게 피어오르고 걷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뭍에서 태어나 자란 해설자는 잘 모른다. 바다의 비파 소리와 겁 없는 섬 처녀들의 축축히 젖은 머리의 의미를. "흘러가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진압의 악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듯도 하다.(p.117)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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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나의 구린새끼 골목』에서/ 2019. 12. 24. <한국문연> 펴냄

  * 김양희/ 제주 서귀포 출생, 2004년『시사사』로 등단, 시집『서귀포 남주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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