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취급주의/ 김혁분

검지 정숙자 2020. 1. 6. 00:59

 

 

    취급주의

 

    김혁분

 

 

  당신이 미리 써놓은 묘비명을 읽었습니다

 

  등불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등불 밑에 우리가 모여 당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발열의 징후처럼 붉은 줄이 늘어갑니다

 

  당신은 모로 누우면

  땅의 소리가 목관악기처럼 편하게 들린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겐 당신의 울림이 낮게 파동쳐 온몸을 저미게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깨진 뒤에야 느끼는 통증만이 남아있습니다

 

  수리할 악기처럼

  당신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당신 밖의 일은

  당신과 상관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미리 써놓은 묘비명이

  모인 우리를 죽비처럼 내려치고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적 주체와 타자인 '당신'은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들은 애초에 하나의 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처음과 끝 역시 같다. 바로 그곳에 삶과 죽음이 있다. 그리고 삶의 순간을 응시하는 죽음이 있다. "미리 써놓은 묘비명"을 읽는 '당신'은 삶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응시하고 있는 존재이다. 당신은 죽음처럼 "모로 누우면"서 지나온 삶과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죽음, 그리고 "깨진 뒤에야 느끼"게 될 통증을 감각하고 있다. 삶을 지나치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당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지나가고, 당신이 예비한 묘비명은 죽음의 이야기를 풀어 "우리를 죽비처럼 내려"친다. 시인이 삶과 죽음을 미리 바라보는 방식은 이처럼 다르지 않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앞에 당도하는 것이고, 시인은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호명하는 '나'와 '너'와 '당신'은 삶과 죽음을 처연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자의 시선이며 삶과 죽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p.99-100) (조동범/ 시인, 중앙대 문창과 겸임교수) 

 

   --------------

  * 시집 『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에서/ 2019. 12. 20. <지혜> 펴냄

  * 김혁분/ 충남 보령 출생, 2007년『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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