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김윤정_ 시 치료의 원리와 방법『위상시학(位相詩學)』/ 검은 사이프러스 숲 : 주영중

검지 정숙자 2019. 12. 27. 15:51

 

    검은 사이프러스 숲

 

    주영중

 

 

  배꼽에 거대한 입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붉은 입이 웃는 일이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

  어서오세요, 이 검고 칙칙한 땅의 어둠 속으로 

  아름다운 즙들로 우린 하나 될 수 있을 거예요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눕고 있으니,

 

  무덤들 위에서

  검은 머리카락들이 자란다

  검은 머리카락들은 무수한 변명처럼 자라,

  검은 머리카락들은 무정형으로 아름답게,

  부드럽고도 날카롭게 꺾인 채 솟아난다

  이 숲에서는 머리카락만이 바람을 만들 줄 안다

  어둠을 결정한다

  검은 머리카락들이 영토를 넓혀 간다

 

  취소되고 잘린 것들이 도착하는 곳

  이곳에선 탄생이 없다

  가까이서 겨자씨 미용실, 멀리 형제 이발소, 더 멀리 집에서 날아온 또 다른 숲들

  거대한 숲은 멀수록 거대해지고

  이젠 검은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건 차라리 거대한 생명으로 하늘을 뒤덮고

  또한 하늘을 검게 물들였으니,

  오늘 잘린 머리카락들은 새로운 영토를 찾아 굴러다니다

  새로운 흙들 위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생활의 수은을 머금은 채, 그 무거운 것들은

  금세 뿌리를 내리고, 무관심의 전쟁을 버티며

  그 세력을 키울 것이다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처럼

  묶이고 서로를 휘감고 밀어내며,

 

  오르셰 커피솝에서, 노란집 식당에서

  오지 않을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처럼,

  기다리면서, 날 생각하고 있을까

  묻혀버린 시간 속에서 떠올라오는

  이름조차 묘비명조차 없는 것들

  가장 중립적인 목소리로 냉정한 목소리로

  날 기입하라

  사이프러스의 숲 너머로는

  또 다른 내가 태어나고 세상은 조금 더 우울해졌을까

  죽음 너머에 이르자 우울이 먼저 당도해 있었다

    -부분- 

 

 

  시 치료의 여러 양상/ 신장 질환의 시 치료 기제(발췌)

  2011년에 발표된 위 시는 많은 현대시들이 그러하듯 초현실적 시공 속에서의 환상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무덤들 위에서 자라는 머리카락'은 초현실주의 시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해당한다. 의미의 명확한 지시를 거부한 채 비현실적 이미지들의 연상과 연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위의 시는 난해한 그대로이다. 위 시의 주된 모티프가 되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은 명료한 너머에서 음침하고 우울한 숲의 분위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검은 사이프러스의 숲'인 것이다.

  환상적 시공을 형상화하고 있으면서 현실주의적 의미망을 상실하고  있는 위의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서적 순화와 안정을 도모하기보다 오히려 공포의 분위기를 조장하여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위 시의 미적 가치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위 시는 무력하다. 의미적 소통조차 어려운 난해한 시들에서 시적 가치와 역할을 찾으려는 시도는 늘 회의감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다만 위 시는 새로운 어법과 양식에 입각한 실험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던 바, 특히 위 시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언어의 의미 및 정서적 전개라기보다는 단위 이미지의 순전한 운동 양식이자 양자적 흐름이라는 사실은 위 시를 위상학적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단위 이미지란 시의 중심 모티프라 할 수 있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이것은 시 속에서 명확한 지시성을 지니지 않는 대신 입자와 같은 에너지의 기본 단위로서 작용함으로써 일정한 파장이 되어 연접과 이접을 계속해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은 머리카락'의 이동하고  운동하는 양상은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유기성을 탈각한 채 기계처럼 운동하고 증식하는 모습과 일치한다. 또한 그것은 양자가 불확정적으로 자신의 파장을 이어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검은 머리카락들'은 스스로 '자라나'고 '무수한 변명처럼 자라'나서 '아름답게' 혹은 '부드럽게' 혹은 '꺾인 채 솟아나'는 형태로 연장되거나 일그러진다. 무한히 증식되고 이어지는 그것은 '새로운 영토를 찾아 굴러다니'면서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묶이고 서로를 휘감고 밀어내기'도 하는 파장 형태의 양자 운동을 펼쳐나간다. 위 시에서 단위 이미지가 운동하는 이러한 모습은 양자들의 초끈이 무한히 연장되며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지는 양상에 견줄 만하다. 위 시에 등장하는 '검은 머리카락'의 상상적 움직임은 곧 미시적 차원의 양자의 흐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위 시의 상상력은 양자의 운동을 반영한 것이자 위 시를 전개하는 동력은 다름 아닌 양자의 역학인 것이다.

  양자들이 초끈을 이루어 무한 증식하고 연장될 때 공간은 왜곡을 겪게 된다. 초끈의 엉김이 존재하는 곳은 또 다른 블랙혹의 지점이어서 이곳에서는 공간의 함몰 내지 응축 등의 공간 왜곡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은 필연적으로 암흑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위 시에서 '영토를 넓혀 가는 검은 머리카락'들이 '어둠을 결정한'다고 말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곳은 '탄생이 없'으며 '하늘은 검게 물들'고 '멀수록 거대해지는 숲'은 '검은 불처럼 타오르'는 듯하다. 어둠 속에서 무한 증식되는 '검은 머리카락'의 지대는 '무겁게' '무관심의 전쟁을 버텨'야 하는 공간이 된다. 이 속에서 시간은 '묻혀버리게' 될 것이며 존재는 존재성을 잃은 듯 '중립적이고도 냉정한' 인간이 될 것이다. 이는 곧 암흑 같은 시공 속에 갇힌 인간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이 속에서 이간은 기계처럼 경직된 채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갈 뿐이다. 실제로 블랙홀이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최근의 환상시에 속하는 위 시는 그것이 단지 환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 속에 양자적 역학이 동력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위 시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것은 이미지일 뿐이지만 이미지를 이끌어나가는 요인은 양자적 역동성인 것이다. 위 시의 이미지 전개 과정은 입자이면서도 파동인 양자가 불확정적이고 무제한적인 운동을 해나가는 형상에 비견될 만하거니와, 단위 모티프인 '검은 머리카락'이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 시가 이 같은 양자역학적 이미지 전개를 선보일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이 시를 창작한 주영중 시인이 1968년생으로서 디지털 1세대에 속한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컴퓨터 세대들에게 양자역학은 생활의 감각 속에 프로그래밍화 되어 있다 해도 틀리지 않다. 시인의 내밀한 호흡을 통해 자연스런 역학을 보여주고 있는 위 시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양자의 흐름을 이미지화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220-224)  

 

  ------------

 * 김윤정_시 치료의 원리와 방법위상시학位相詩學2019. 11.11. <박문사>펴냄

 * 김윤정/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국문과 교수, 주요저서『김기림과 그의 세계』『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지형도』『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문학비평과 시대정신』『불확정성의 시학』『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한국 현대시 사상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