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양경언_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 김민정

검지 정숙자 2020. 1. 28. 10:49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김민정



  처음 극장이란델 가서 본 영화가 「개 같은 내 인생」이었다. 하필 그랬다 중학교 1학년을 단체 관람시킨 도덕 선생님은 전교조였다. 하필 그랬다 한 번 봤으면 됐지 싶은 영화를 보고 또 보러 다니는 사이 선생님은 이미자도 아니면서 섬마을 선생님으로 불려갔다 하필 그랬다 광화문의 교보문고 입구 옆에서 한 남자가 복제판 디브이디를 늘어놓고 파는데 근 20년 만에 그 영화도 있었다 하필 그랬다 침대에 벌렁 누워 영화나 보는데 어디선가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김민정 씨…… 신현정올시다…… 김민정 씨…… 우리 개가 아랫집 개를 물어 죽이고 어디로 내뺏다는데…… 그 집 연놈들이 씩씩거리며 문 차고 들어와서는 날 아주 잡도리하듯 그거이 참…… 개를 찾아 개보고 나보고 사과를 하러 오라지 않수…… 이 비에 그니까 비가 와 개새끼가 미쳤나…… 생돈 십 만 원 물어주고 내 속이 쓰려 술 한 잔했시다…… 김민정 씨…… 미안합니다 근데 이 미친놈의 개새끼는 어디 가 숨었을까요…… 비가 컴컴하니 이렇게 억수인데…… 며칠 지나 시인 지망생 후배 몇이 보신 약속을 잊었느냐 해서 불광동 개고기집엘 끌려갔다 하필 그랬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마시는 한 남자의 목에 걸린 금줄에서 땀이 뚝뚝 떨어질 때, 내가 핥고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에서 단물이 뚝뚝 떨어질 때, 맞은편 굳게 철문 내린 치킨집 앞에 멀뚱하게 선 개 한 마리 이리 올까 말까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데 이 간격의 팽팽한 시위 아래 매미 한 마리 툭 떨어져 잠시 울음소리 고요도 하였다 하필 그랬다

   -전문, (밑줄은 인용자)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_김민정론/ 1. 작은 사건들(발췌)

  "하필 그랬다"가 등장할 때마다 시적 장면은 전환된다. "하필 그랬다"라는 말에 묻어나는 묘한 자포자기의 심정, '사정'을 말하고자 하면 길어질 수도 있기에 결국 시를 통해 현재 보여줄 만한 것은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무조건적인 현시밖에 없다는 무모한 태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 '사정'에 대한 최선의 말하기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예감이 시적 화자의 우회적 말하기를 지지하게 한다.

  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사정'에 대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 온 저변을 서성이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겐 사정을 찾아 시 본문이 아니라 시인이 본문 끝에 대롱대롱 달아놓은 주석을 들추어보는 방법을 추천해본다. 실제로 시 본문 마지막에는 "신현정" 시인의 별세를 알리는 '*' 표시의 문장과 시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시인의 자조가 함께 섞여서 실려 있는데, 독자들은 '하필이면' 죽은 시인에 대한 기억이 '개'와 함께 어우러진 이 상황을 사정의 전말이라 여겨야 하는 불편에 당도하게 된다.(김민정의 두 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의 제3부 제목은 '신은 각주에'다. 그녀는 자신의 시가 사실 애초부터 '神'을 (마치 글의 각주처럼) 바닥에 깔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주'를 향해 가며 진위를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애초부터 신이란, '각주'에나 매달아 놓는 '신'발 같은 것 아닌가. 축하한다, 김민정식의 아포리아에 우리는 계속해서 당도하고 있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필 그랬다"라는 사건의 재구성에 속고 있는 것이다. 시적 주체가 진술하는 장면들 모두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같은 장면들이 다른 모습으로 변태한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기이하게 공존해 있는 이 상황에 말이다. 심지어 장면 내의 이미지들 사이에서는 역설마저 발생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데, "불려가는" "도덕" 선생님이라든지, "미안합니다"라는 인사가 숨겨놓은 "미친 놈"이라는 욕의 발설이라든지, 개고기를 먹은 나와 내 앞에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개의 이미지가 대놓고 충돌하는 식의 역설이 뻔뻔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사정이란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을 이와 같이 대놓고 병치해서 전시할 수밖에 없다는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러니까 시적 주체에게 잠입해 들어오는 '사정'의 진위 여부란 폭력의 질서가 남기는 자취에 불과하다. 이는 '해소'와 '화해'가 소거된 세계의 말하기 방식이며 동시에 매우 하찮은, 그래서 망각한 줄만 알고 있었던 작은 사건들이 "팽팽한 시위 아래" "툭 떨어"지는 경험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시침을 뚝 떼며, 이러한 모든 의미들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이라는 말 속에 묻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안 그런 척하면서, 시적 주체는 은근슬쩍 고발하는 것이다. "하필 그랬다"라는 푼크툼(punctum. 작은 디테일에서 얻는 암도적 경험)을 통해서 도도하게 노려볼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도리어 우리를 노려보면서 '불가피한 잠입'의 시도를 줄기차게 이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p. 시197/ 론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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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언 평론집『안녕을 묻는 방식』2019. 12. 30. <창비>펴냄

 * 양경언/ 1985년 제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11년 『현대문학』에 평론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김민정론」을 발표하며 비평활동을 시작함, 2019년 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