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이찬_비평집 『시/몸의 향연』(발췌)/ 잠 속의 잠 : 김다호

검지 정숙자 2019. 3. 13. 12:31

 

 

    잠 속의 잠

 

    김다호

 

 

  차단기 앞에 서면 텅 빈 가슴 속에서 기적 소리 들린다

  저무는 노래들 바람에 휩싸여 레일 위로 눕고

  빛인 듯 바람인 듯 흘러가는 철길을 멍하니 바라볼 뿐

 

  눈을 감으면 장자의 껍질을 깨고 나와 날갯짓하는

  나비들 까마득 하늘을 뒤덮는데

  거친 매듭을 닮은 나비 떼들 속에서 허둥대는 사이

  가물가물 춘몽을 향해 흘러가는 기차

 

  잠자고 싶을 때 잠들 수 없고

  낮에도 밤에도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가득한 내 몸 때문일 테지만

  철길 위로 나비되어 퍼붓는 함박눈 보고 있으면

  더욱 간절한 잠, 잠, 잠

 

  꼬여진 매듭을 더듬을수록 잠은 잠 속으로 숨어 버리고

  차단기 너머 스멀대는 잠의 소리를 깨물고 있으면

  밤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채 깊어 간다

 

  내 머릿속에는

  벌겋게 녹슨 채 열릴 줄 모르는 차단기가 있다

   - 전문-

 

 

   ▶ 천의 진실로 열리는 천의 페르소나들/ - 이운진, 김충규, 정용화, 김다호의 시(발췌)_ 이찬

  김다호의「잠 속의 잠」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인간의 내면의 외부이자 의식의 타자라는 모티프의 중핵을 "잠" 이미지로 축조한다. 이는『장자莊子』에 기록된 호접지몽胡蝶之夢 이미지와 결합되기도 하고, "철길" 안과 밖을 구획하는 "차단기"의 이미지로 확장되기도 한다. 또한 "잠자고 싶을 때 잠들 수 없"다는 불면증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따라서 "잠" 이미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실제 "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현대인들이 제 스스로의 내면을 합리적으로 통어해야만 한다는 자기 규율의 원리를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현대 세계에 내장된 저 합리성의 공화국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가해한 외부는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가득한 내 몸"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더 나아가 "내 몸"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다른 얼굴들, 곧 사유되지 않은 것이자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성은 "꼬여진 매듭을 더듬을수록 잠은 잠 속으로 숨어 버리고"라는 은폐와 매장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페르소나는 "내 머릿속에는/ 벌겋게 녹슨 채 열릴 줄 모르는 차단기가 있다"라는 편린으로 아로새겨진 분열증적 주체(schizophrenic subject)의 이미지를 얻는다./ 어쩌면 저 분열증적 주체야말로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현대 세계가 기계적 방식으로 양산하는 이성적 주체의 쌍생아이자 이미 그 내부에 똬리를 틀고 앉은 "풀리지 않는 매듭"이며, 그 분신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 작품의 페르소나는 분열증적 주체와 마주칠 때서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진리 주체의 진상일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적 경험 속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사회적 페르소나는 우리들 각자의 실존적 주체성과 무관한 그야말로 가면들에 불과한 것이며, 차라리 예술가적 가면으로서의 시적 화자야말로 천의 진실로 열리는 천의 페르소나들이라고. (p.397~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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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비평집『시/몸의 향연』에서/ 2019. 1. 12. <파란> 펴냄

* 이찬/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서울신문》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