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전해수_『메타모포시스 시학』(발췌)/ 니얘기 : 주요한

검지 정숙자 2020. 3. 7. 00:52



    니얘기

    - 어린 누이들에게(주요한, 『아름다운 새벽』1924, 수록시)


    주요한(1900-1979, 79세)



  고운 손에 새로운 「날」을 든 봄이

  초록색 긴 치마를 입고 걸어옵니다

  눈_속에서 생겨난 토기새끼가 봄을 맞으러 산기슭에서 벌판으로 뛰어갑니다

  아_봄이 옵니다. 햇빛에 번뜩이는 시냇물 우에, 주둥이 샛노란 병아리 빽빽 하는 소리를 따라, 산에도 들에도 한결같이 즐거운 노래를 퍼치는 봄이 올 적에

  그리하고, 아름다운 새벽이 세계 우에 웃으면서 나타날 적에

  네 바구니를 가진 네 처녀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한 가시덤불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꼭대기에는 더없는 향기를 피우는 만첩꽃이 바다의 물결같이 가득히 핀 것이 보입니다

  용감한 네 처녀는 돌 많고 엉키는 넉지 많은 산비탈을 얼마 못 올라가서

  가시나무로 세운 담장을 만났습니다

  첫째 처녀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가시덤불로

  나의 보드라운 살을 뜯지 않고는

  이 산 우에 못 올라간다 하면

  나는 싫소, 나는 울라가지 않겠소.

  그까짓 꽃은 가지고 싶지 않소」하고 옆구리에 끼었던 바구니를 가시덩쿨에 던지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세 처녀 앞에서 없어지고

  아까 떠나온 산기슭 마른 흙 우에 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처녀는 그들의 흰 치마와 아름다운 뺨이 찢어지고 붉은 피에 물들기까지 애를 써서

  더욱 더욱 우르르 가시담장을 넘어 올라갔습니다

  얼마 더 안가서 그들은 시꺼먼 물이 죽은 듯이 고인 넓은 못가에 다다랐습니다

  그 못 속에서 아지 못할 손이

  무서운 소리와 함께 손짓하여 부르는 것도 같고 저편 언덕에는 깊은 안개 속에

  날샌 두 눈이 말없이

  이편을 노려보는 듯도 합니다

  어디선지 조고만 배가 젖는 이도  없는데 저절로 언덕에 와닿았습니다. 둘째 처녀가 말합니다

  「저 물은, 나의 깨끗한 살을 더럽힐 터이지,

  저 되인 안개는 나의 숨을 막으려 한다

  무엇하러 이런 데까지 찾아왔을꼬

  아까 그 애와 함께 돌아갈 것을」하고, 옆구리에 꼈던 바구니를 검은 물 우에 내어 던지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두 처녀 앞에서 없어지고 산그슭 마른

  흙 우에 한 걸음 먼저 떨어진 그의 동무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두 처녀는 서슴지 않고

  저절로 물 우에 떠가는 배를 잡아타고

  안개와 내가 자욱한 언덕에 나렸습니다

  두 바구니를 가진 두 처녀는 밤중 같은 어둠 속으로

  길도 없는 산골을 더듬어 올라갑니다

  그것은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화려하게 핀 꽃들이 어둠을 뚫어, 그렇게 똑똑히

  바라보이는 까닭이올습니다.


  그러는 새에 안개도 벗어지고

  두 바구니를 가진 두 처녀는

  바라고 바라던 산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꽃은 간데 없고, 다만 한층 더 높이

  한층 더 험한 산이 그 앞에 솟아올랐습니다

  겨우 뵐 만한 그 감감한 꼭대기에는

  지금껏 보던 것보다도 더욱 훌륭한 꽃들이 수없이 피어서

  바람 불 적마다 흐늑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에 어디선지 모를 곳으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보아라 네 앞에 있는 끝없는 싸움을」

  그러나 셋째 처녀는 기를 써서 소리를 높여

  「오오 다시 나를 속이지 말라

  미련함으로 세운 너의 碑石이 다만 너를 웃어주리로다」

  이렇게 괌치고, 옆구리에 꼈던 바구니로 앞에 막힌 산을 치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다른 처녀 앞에 없어지고

  산 밑에 마른 흙 우에 그를 기다리는 두 동무 곁에 있었습니다

  넷째 처녀는 슬픈 맘으로 동무의 스러진 편을 둘러보다가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한층 더 험하고 가파로운 산을,

  아침에서 낮으로, 낮에서 저녁으로

  빛과 어둠이 번갈아 차지하는 때를 더듬어

  쉴새없이 고생과 외롬의 사이에

  꿈으로 보는 산 우의 꽃을 향하여

  그의 끊임없는 걸음을 옮겨놓았습니다


  산 아래서는 마음 약한 세 처녀가

  이제 저의 남은 한 동무가 마저 내려와서

  전 같은 넷의 친한 사이를 지울 때를

  날을 두고 달을 두고 기다립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습니다

  그 여름도 지나고 깨끗한 가을도 지나며

  또 바람 찬 겨울까지 지나서

  또 다시 노란 눈동자 가진 새봄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리는 동무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문- 

 

「니얘기」에는 "어린 누이들에게"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네 명의 처녀 즉 누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네 처녀가 바구니를 가지고 꽃을 찾아 산으로 올라간 일을 산문적 문체와 서사적 이야기 구조로 쓰고 있다. 세 처녀는 차례로 "가시나무 담장"(1연), "연못"(2연), "어둠"(3연), "험한 산"(4연)을 만나 낙오되고 한 처녀만이 고난을 이겨내고 무사히 산을 오른다는 이야기이다. 나라 잃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노력이 유약한 누이의 여러 모습 속에서 묘사되어 드러나고 있는데 서사적 서술성을 갖추고 있어서 독특한 시의 장르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시 「눈」은 산문적 정황과 서술적 문장으로 산문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시로서 '눈'이라는 설정에서 일제의 압박과 무력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민족애를 느낄 수 있는 시편인데 주요한은 산문시에서 서정보다는 서사구조을 전달하려는 양식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주요한의 산문시는 근대적 인식으로서의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서술방식의 한 채택으로 산문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형시의 서정성을 대신할 수 없는 경우 주요한은 자유율격을 채택하여 서사구조의 원형으로 사용한 것이다.(p. 시 97-100/ 론100-101)


    

  '서도'라는 용어는 '남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지역을 포괄하여 일컫는다(김인숙 · 김혜리, 『서도 소리』, 민속원, 2009, 3쪽 참조). 문학에 있어서 '서도'나 '서도 정서', '서도성'이라는 말은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용어이지만, 한국 전통음악 분과에서는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 전통음악에서 규정하고 있는 '서도'의 개념은 음악의 성향과 범위를 정할 때 지역적인 구분에 의해 지칭하던 것으로, 관서關西지역과 해서海西지역을 구분하지만 일반적으로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을 포괄하는 등 북한지역을 총괄하면서 지칭되어왔다.(p. 61)

  

  주요한의 산문시 「니얘기」는 전설이나 설화의 주조를 지니고 있지만 내면에 정착된 근대적인 주제가 흥미롭다. 서정적인 시에 서사적 구조를 끌고 와서 시의 제목은 '니얘기(이야기)'로 삼은 것도 서사성에 대한 주요한의 시적 장르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이야기시의 구조도 위 시에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주요한에 의해 이미 시도된 셈이다./ 그런데 시의 서정성에 서사성을 가미한 주요한의 시도는 시의 전통성을 무너뜨리려는 전복의 혁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존과 상생의 분별적 혹은 이질적 양상이 그에게는 동류의 방식으로 존재하였음을 입증하는 바와 같다. 주요한은 전통 시 양식을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전통적 시 형식을 외면해서는 더더욱 아니라, 시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으로서의 산문시가 그에게는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동시대의 실험적 자유사상과도 깊게 관계하는데, 이러한 기질의 바탕에는 서도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본고의 주장인 것이다. 서도성은 주요한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류이자 분기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p. 96-97)



  주요한은 1919년 최초의 근대자유시「불놀이」를 『창조』창간호에 발표하였다. 「불놀이」는 행 구분을 무시하고 산문적 형태를 띤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되었다. 물론 3음보의 전통 율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정적 정조를 기본으로 한 그리움과 이별의 정한이 드러나 있지만, 당시로서는 행 구분 없이 이어내린 자유로운 시적 형태와 대담한 시적 표현이 전통 서정시와는 다른 시의 형태로 인식되었다.(p. 127)  


  이처럼 주요한 「불놀이」는(모든 슬픈 것을 불살라 버리는 '불'의) 상징적 표현과 내면의식의 표출, 구체적인 서도지역 지명의 사용, 전통적인(서정적) 정조 등을 통해 님을 잃은 슬픔과 고뇌를 '불'의 상징성으로 접근하여 감정의 극대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배면에 서도민요 <엮음수심사>의 영향이 내재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근대자유시『불놀이』의 형성은 다분히 전통성에서 연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p. 140)



    -------------------

  * 메타모포시스 인문학총서 003『메타모포시스 시학에서/ 2019. 11. 30. <선인> 펴냄

 * 전해수(본명, 全映珠)/ 문학평론가, 저서『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2006),『목어와 낙타』(2013),『비평의 시그널』(2018) , 문학박사(동국대학교),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