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도시
김춘식
처음 백 년 사이 그 모래의 도시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멀리서 구름의 그림자가
사막의 언덕을 얼룩지게 하는 동안,
천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모래는,
그 도시의 하천에서
즐거운 물소리를 흉내 내며 흘러간다
물기 없는 도시에선
한 통의 모래를 뒤집으면
천년의 시간이 스쳐간다
- - - 어느 때인가,
외지에서 찾아온 이방인이
한 통의 모래를 실수로 넘어뜨려,
한 줌 모래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모래 도시의 성지기는
빈 모래 통 속에, 그를, 다시
얌전히 채워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는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크고 작은 모래시계가
길을 따라 여기저기 길게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방금 채워진 모래 통은
길고 투명한
유리관처럼 생겼는데, 이 성의 현자는
모래의 작은 알갱이들이
각각 자신만의 숫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절대로 중복되지 않는 고유의 숫자들이
긴 유리관 안에서 언젠가
누군가의 실수로 엎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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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김춘식/ 1992년《세계일보》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평론집『불온한 정신』, 연구서『미적 근대성과 동인지 문단』외, 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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