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면
이희형
운동장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다 보면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
누군가 어두워지기로 마음먹기 전의 순간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가로등 밑의 긴 의자에서
아이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감싸 안은 손가락이
한 장 한 장
책장을 쓸어 넘기는 동안
운동장의 모래알들이 조용히
각자의 그림자를 갖게 됩니다
책을 읽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책 속으로
책 밖으로
번져나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구든 자라나는 것이라고
텅 빈 운동장이 가득 차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잠시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없고
의자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아이는 잘 돌아갔을까요
이미 늦은 시간이었는데
혹시 어디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궁금해지다가
슬퍼지다가
놓여진 책에 대해 생각합니다
생각하다 보면
옆자리를 비워둔 사람
사람들의 목소리들
의자 위에 책이 놓여 있습니다
빈자리마다 주인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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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이희형/ 201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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