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영숙_ 시의 방위(方位)/ 지구를 지켜라 : 김행숙

검지 정숙자 2019. 12. 9. 01:47

 

 

    지구를 지켜라

 

    김행숙

 

 

  밤마다 지붕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 몰래 후원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시를 쓰거나, 폭약을 제조하거나, 자위, 자해, 자살을 하는…… 그러나 밤은 이미 패색이 짙습니다. 저들은 패색을 밤의 색깔, 지구의 기분이라고 부릅니다. 저희들의 패색왕이여,

 

  낮이 연장, 연장되었습니다. 낮이 1시간이라면 밤은 1초. 밤의 정신은 퇴각, 퇴각…… 퇴각의 초침 속에 깃들어 있어요. 심야택시 한 대가 밤의 퇴로를 빠져나갔습니다. 지구는 뿌리 없는 나무예요. 동지여, 무사히 도착하면 그곳 사정을 알려 줘요. 그곳에도 밤마다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밤의 지붕에 오두카니 앉아서……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면,

 

  가슴팍에 칼을 꽂듯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공포를 깨우쳤다면, 새로운 신입당원이여, 지붕 위로 쫓겨난 개여, 아직도 자기 믿음이 부족한 자여, 그대는 비밀을 파헤친 자, 더 많이 알게 된 자예요. 지구는 날개 없는 거대한 새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얼굴은 뺨을 맞은 자의 얼굴과 닮았습니다. 지금 뺨을 맞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전문, 『시와반시』2019-가을

 

 

   ▶ 감정의 심미적 현현顯現(발췌)_ 이영숙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남미의 '불개미 똇목'은 잦은 홍수를 이겨내기 위한 불개미의 생존 전략이 진화한 결과물이다. 적게는 수백 마리에서 많게는 수백만 마리가 서로의 입과 다리를 물어 거대한 뗏목을 형성하는데, 마른 땅을 만날 때까지 물 위에서 최대 3주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이 여왕개미와 알들을 안전하게 둘러싸면서 대오를 구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분 이내라는 사실은 존속위기타이머를 생존의 방향으로 돌리는데 필요한 유효시간의 긴박함을 말해준다. 1년 남짓 산다는 불개미와 기대수명으로 80년을 넘겨 사는 인간을 놓고 봤을 때, 이미 10여 년 전에 지구의 환경위기시계가 가리킨 21시 33분은 익사냐 생존이냐를 가름하는 불개미의 2분에 해당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개미와 달리 인간세계에서는 소수만이 '똇목'의 필요성을 인지할 뿐 대다수가 '2분'의 긴박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위기의식에대한 외마디 절규와 같다./(……)/ 사실을 말하자면 "연장, 연장"되는 "낮"은 거짓의 표현이고, "퇴각"하는 "밤"은 진실의 내면이다.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자와 "공포를 깨우"친 자를 향해 시의 주체가 촉구하는 것은 아르키메데스의 반어적 어법과 한나 아렌트의 제안적 어법보다 더욱 날카롭고 초조하다. 지구 밖 20세기의 정치사상가에게 아직 인간에 대한 기대가 섞여 있었으나, 21세기의 시인에게는 "초침" 소리만이 째깍거린다.(p.182-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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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2019-겨울호 <계간시평>에서

  * 이영숙/ 1991년『문학예술』로 시 부문 & 2017년『시와세계』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詩와 호박씨』『히스테리 미스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