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전철희_한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발췌)/ 어느 오랜 기후 : 박민서

검지 정숙자 2019. 11. 25. 00:47

 

 

    어느 오랜 기후

 

    박민서

 

 

  통조림 속을 흔들어보면

  담장을 달리는 장미의 함성과

  사과나무가 있는 정원과 그리다 만

  집의 설계도가 섞여 있다

 

  흔들면 흔들리는 것끼리 부딪쳐

  모퉁이가 찌그러진 흔적

  오래 두고 먹을 날이 있기는 할까

 

  무균실이 쏟아질까

  중력을 꽉 닫는다

 

  어딘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상흔은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공기다

 

  뚜껑을 따면 찌그러진 맛이 날 거라 여기지만

  그건 통조림의 안쪽이 물고 있는 연명이 아닐까

 

  찌그러진 곳이 유일한 기둥인 듯

  흔들림에도 오랜 기후가 끌려 나온다

 

  살균된 관습은 굴려가는 관습

  빈 깡통은 더 요란한 관습으로

  무한을 향해 간다

 

  내려야 할 정거장이 사라지듯

  유통기한 지워진 날들이 오랜 기후에 갇혀 있다

    -전문-

 

 

 

  ▶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에너지(발췌)_ 전철희/ 문학평론가

  시인이 "유통기한 지워진 날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세상에서 "유통기한"이 없는 영속적인 것이 존재할까. 이것은 사실 종교적인 질문인데, 이 작품이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일차적으로 세계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인식을 펼쳐놓은 이후에 그것을 벗어난 "오랜 기후"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즉 그는 현실을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그린 것을 찾겠다는 결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p-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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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2019-겨울호 <미학적 통증과 사유/ 신작시/ 작품론> 中

  * 박민서/ 2019년『시산맥』으로 등단

  * 전철희/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