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론>
어떤 속도에도 굴하지 않는 속도의 시인
정숙자
문학이 아니어도 문학만큼의 충만을 어디선가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문학을 접었을지 모른다. 문학이 아니어도 문학만큼 이성을 깎고 가슴을 들끓게 하며 뼈를 담금질할 열락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미 잉크병의 뚜껑을 닫고 펜을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세계는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학이 주는 고뇌와 갈등, 인과와 응보가 제아무리 극한 통증으로 작용할지라도 ‘숙명’으로 뭉뚱그리며 인생을 채워나간다. 문학인생! 참으로 경건하고 슬프고 꿋꿋하지 아니한가. 여기 그 ‘문학인생’을 엮어온 한 시인의 시가 있다.
녹슨 철조망 몇 가닥 걸린 말뚝에 고추잠자리 앉았다
고추잠자리 눈 감고 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집게손가락으로
잡으려는 순간,
고추잠자리 살짝 떴다 놓쳤다 빈 손가락이 무안했다
푸른 허공에 고추잠자리 떼 휙휙 휘파람 불면서
활공(滑空)하는 밝은 풍경,
고추잠자리 날개가 햇살의 살갗처럼 투명하다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놓거나 실패하면 재빨리 체념하고
허공을 보았다
그렇게, 깨끗하고 배고팠다
나의 아름다운 실패
고추잠자리야
-윤강로,『작은 것들에 대하여』에서「고추잠자리」전문
잡으려다 놓친 고추잠자리에 얹어 자신의 ‘실패’를 아름답다고 표현한 시인, 윤강로(1938~. 1976『심상』으로 등단). 실패란 생의 노정에서 가장 쓰라리고도 무겁고 어두운 정서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름다움=고추잠자리=실패’를 일직선상에 위치시켰다. “재빨리 체념하고 허공을 보았다/ 그렇게, 깨끗하고 배고팠다” 이 문장에서 투명하지 아니한 언사가 없다. 실패의 구체성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실패’라는 한마디의 본질만으로도 화자의 내면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얼마만큼의 수양이 쌓여야 저리도 맑게 비애를 노래할 수 있을까.
시는 삶과 격리될 수 없다. 아니 삶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게 필자의 견해다.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시인이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는 요즘, 그와 정비례하여 개성이나 이론의 양상도 그 어느 때보다 난만하다. 머리만으로 직조된 시가 있는가 하면, 가슴만으로 빚은 시, 발만으로 굴린 시와 성기(性器)만으로 그려낸 시도 있다. 시의 품은 넓고도 깊고 높으므로 그 모두를 수용/허용한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 지향을 언급한다면 온몸으로 켠 시를 꼽을 것이다. 시란 지은이에게는 물론 독자에게도 희망과 위안, 삶의 필수 영양소로 회자될 때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방문을 열어 놓으면 불청객 날것들이 들어와서
방안을 마구 휘젓는다
더러운 곳에서 빨아먹다가 날아온 똥파리
읽던 책으로 후려치니
저만치 옮겨 앉아 태연히 앞발을 비빈다
뻔뻔스러운 놈
날파리 한 마리가 어지러이 날고 있다
날파리는 구불텅하게 돌아갈 줄 모른다
짧은 직선 긴 직선 순간적 직각으로
수없이 방향을 바꾸는
약삭빠른 놈
모처럼 곁에 아무도 없다
한낮 창밖 하늘에 구름 한 송이 떠 있다
태깔이 깨끗하구나
멈춘 듯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구름은
내 삶의 최고 속도
적막에 젖으면 너그러워진다
내가 방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문호 개방이다
똥파리야 날파리야
너에게 악수를 청한다.
-윤강로『약한 것들에 대하여』에서「따뜻한 악수」전문
세계는 새로움과 변화를 갈망한다. 그로 인한 욕구는 멈출 수 없는 속도를 탄생시킨다. 우리에게 편리함을 선사했던 속도는 어느덧 속도를 붕괴시키는 차원으로까지 질주해 들어간 상태다. 한국의 현대시는 뉴웨이브라는 기구를 타고 환상의 세계로 날아갔다. 그 환상의 공간에서는 더 이상 지구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통이 미덕으로 작용한다. 알 수 없는 우주 어딘가에서 모스부호로 전해져오는 선율! 참으로 멋있고 훌륭하다. 그렇지만 잠깐, 여기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속도가 모든 시인에게 통용화폐의 단위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우 쏠림현상에 편승했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한단지보(邯鄲之步 :『장자』추수편)에 봉착하게 된다. 작금의 어수선한 물살을 관조하며 청아함과 온유의 보폭을 굳건히 지켜온 윤강로 시인의 새 시집『약한 것들에 대하여』를 읽었다. 위에 옮겨 적은「따뜻한 악수」뿐 아니라「초록색 애벌레」에서도 “내 삶의 최고 속도는/ 여름하늘에 속없이 흘러가는 흰구름이다.”라는 말씀이 유독 빛으로 남는다. 어떤 속도에도 굴하지 않는 속도의 문학-인생, 만세!
*『시와표현』2011-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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