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시사사 리바이벌/ 침묵피정 1 : 신달자

검지 정숙자 2014. 9. 23. 16:17

 

 

  <시사사 리바이벌 - 다시 읽어보는 오늘의 명시집!!!>

 

 

     침묵피정 1

 

       신달자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었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 드리고 싶다

                                           -전문-

 

 

  침묵은 말 이전의 언어이며 언어 이후의 말이다. 또한 침묵은 시간과 맞먹는 무한대의 포용력과 정화, 생성력을 갖는다. 가령 어느 한 개인이 침묵에 들었을 때, 그 침묵 속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타인이 엿보거나 짐작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침묵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대개는 침묵과 대면한 자기 자신조차도 침묵을 주도하기보다는 다만 그 침묵이 소유한 시간과 정황에 싸인 채 서 있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의 중력을 지탱하거나 재편성하는 일련의 잔물결을 숙독하는 견자, 그가 바로 침묵에 든 자가 아닐까.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는 겨울 경으로 이 시는 침묵의 문을 연다. 산도 산사도 피정이 필요한 것일까. 피정이나 피병은 스스로 자리를 옮겨 지친 영혼과 신체를 돌보지만 “계곡 옆 억새들”이나 “들수록 좁아드는 길”이야 어떻게 어디로 피정/피병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지리적 여건을 어찌할 수 없는 그들은 '침묵'을 장소로 변환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그리하여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침묵피정'에 드는 것이다. 하 많은 수런거림과 흔들림, 물듦을 멈추고서 말이다.

  “단단히 고체가 되어”, “천 년 넘은 수도원”처럼 “입 다”문 곳에서 시인이 무엇을 보았을까, 하는 요지의 답은 여기 이렇게 숨겨져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고. 그러나 우리는 '섬뜩한 고립'이라는 대목에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처음엔 ‘섬뜩’했던 그 고립마저도 ‘피정’을 통해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고 하는 녹는점에 닿았으므로. 그리고 그 승화된 차원의 고요를 향해 “경배 드리고 싶다”는 겸허까지를 내포했으므로. 그 변증법의 반복으로 봄과 가을이 또 올 것이므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제삼자가 듣기 마련이며, 그 제삼자가 바로 침묵이다.”라고 막스 피카르트는 말한다(『침묵의 세계』2013.7.15, 3판4쇄. 까치글방). 그리고 같은 책에서 “침묵 속에는 미가 존재하며, 그 미는 침묵하면서 모든 것에 스며들어가는 시로부터 생긴다.”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원초적 질문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다. 시와 침묵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시와 침묵과 정화된 영혼과는 어떤 파장을 일으키며 자아성장의 영감을 불러오는 것일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인 그 침묵!

  시인은 자연을 말하되 자신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표현하되 은은히 히며 그 안에 흔들림 없는 섬을 세운다. 결국 그 섬은 물 위에 내보이는 큼의 섬이 아니라 바다 밑 심층부에 깊이깊이 뿌리내린 삶의 전체일 뿐더러 절제하고, 압축하고, 쌓아올린 고밀도의 오벨리스크임을 최저음으로 선언한다. “말과 소리를 벗”는다 한들, “아예 성대를 잘랐다”한들 그 소리는 해체가 아닌 응집이며 변증법에서의 '합'에 이르는 단계일 것이다. 입부에서 언급했거니와 침묵과 시간은 무한대의 가능성을 포괄한다. 예측할 수 없는 신화를, ―건널목을. (정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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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사』 2014. 9-10월호(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