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작품론/ 정숙자>
계단에서
김현식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아무 것도 보지 마
오직 계단만 봐, 계단을 무사히 내려가는 데만
신경을 써,
계단 한 귀퉁이에 반 정도 먹다만 자장면이 있는데, 아,
헛발 디뎠어 팔다리가 까지고 이마가 깨졌어
자장면 같은 피가 여기저기 튀겼어
것 봐, 기껏 자장면 그릇에 정신을 팔더니
상처투성이야 이젠 얼마동안 걷기도 힘들 거야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자장면 그릇에서 나무젓가락이 어지럽게
춤을 추다가는 이내 잠잠해진다
한 계단 한 계단 그저 조심해 오로지 그것만 생각해
그것만이 현실이야 무사히 내려갈 때까지는
꽁초가 말라 죽은 벌레처럼 버려져 있고
난간 위에는
커피 마시고 버린 빈 종이컵만이 쓸쓸히 걸터앉아
무심한 마음만 부여안고 있다
그래도 어떻게 해, 모른 체 할 수 없잖아
그것도 현실은 현실인데….
-전문-
김현식의 시민의식과 계단의식
정숙자
흔히 산은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올라가기’와 ‘내려가기’라는 어의를 뜯어보자. ‘올라가기-성공’, ‘내려가기-귀환’이라는 등식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이 시에서 ‘계단’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목표한 삶에의 도정일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한발 한발 올라갈 때는 온 신경이 곤두선 상태이기 때문에 실족을 염려할 틈조차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꿈을 이루는 순간 그 꿈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기실 깎아지른 고독은 한발 한발 오르는 과정에 있기보다도 꿈을 이룬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때야말로 누가 도와주기는커녕 이용해보려는 축과 질시의 눈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많은 이에게 도전대상이 되어질 따름이다. 꿈을 이룬 자에게는 더 이상 올라갈 계단도 동료도 없다. 그때 현명한 사람이라면 성공을 무너뜨리지 않고 ‘잘 내려가기’를 다음 목표로 삼을 것이다. 시인 김현식은 노상 오르내리는 ‘계단에서’ 그러한 삶과 현실과의 상관관계를 꾸밈없는 필체로 포착했다.
화자는 이제 안전한 착지를 꿈으로 품었는가보다. 아니, 모든 이에게 일러두고 싶은가보다.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아무것도 보지 마/ 오직 계단만 봐, 무사히 계단을 내려가는 데만 신경을 써,”라고 하니 말이다. 사랑이든 병(病)이든 부귀영화든 내려가는 걸음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자아편달, 또는 체험적 고찰로 짚인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시(詩)가 단순히 기교적 언설에 그친다면 얼마나 허허로울 것인가. 게다가 시인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착지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헛발”을 디뎌 “팔다리가 까지고 이마가 깨”질지라도 내려오는 계단에 말라버린 ‘꽁초’나 ‘커피 마시고 버린 빈 종이컵’ 등의 쓰레기가 “걸터앉아” 있다면 “모른 체 할 수 없”다지 않은가. “그것도 현실은 현실인데….”라는 끝 행에서 시인의 사회에 대한 애정과 자존자율의지(自存自律意志)가 드러난다. 2006년 등단한 시인 김현식의 지필묵이 돛폭을 올리고 지국총지국총 전진 중이다. 그의 ‘내려섬’이 또 한번의 탄탄한 ‘올라섬’이 될 것을 기원/기대한다. ▩
* 『꽃이 바람의 등을 밀다』2009 '정표예술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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