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

정재민_ 무장의 빛과 그림자를...(발췌)/ 어전에 실언하고 : 구인후

검지 정숙자 2019. 11. 2. 02:38

 

 

   

    무장의 빛과 그림자를 읊은 시가들(발췌)

 

     정재민/육군사관학교 교수

 

 

  조선의 왕이 백관의 조회를 받을 때, 왕은 북쪽에 자리를 잡고 남쪽을 향해 앉았다. 북좌남향北座南向의 예법을 따랐다. 이때 동쪽에는 문반文班이, 서쪽에는 무반武班이 섰다. 이들 문반과 무반 혹은 동반과 서반을 함께 일컬어 양반兩班이라 불렀다.

  양반이란 말은 고려 초기 당나라 관직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 사용했다. 문반은 정무政務를 담당하고 무반은 군무軍務를 맡아 처리했다. 적어도 제도적인 측면에서 문반과 무반은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달랐다. 문반과 무반의 차이는 과도하게 컸다. 새파랗게 젊은 문신이 저보다 반열이 높은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일이 일어나거나, 왕을 호위하는 장군의 수염에 불을 붙이는 사건도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일부 경박한 문신에게 국한된 일이겠으나, 그 당시 무신들이 느껴야 했던 모멸감은 극에 달했다. 오죽했으면 무신정변이 일어났겠는가.

  조선 역시 문반과 무반으로 이루어진 앙반체제를 택했다. 그러나 고려 때처럼 문부반 사이의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다. 무관 선발을 위한 무과시험이 지속되었고, 무인들도 종9품부터 정3품까지 품계가 마련되었다. 고려에 비한다면 한층 더 균형되고 발전된 문무반 제도가 시행되었다. 문무관에 대한 구별은 여전했으나 차별은 줄어든 셈이었다.

  조선시대의 무관들은 양반이자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그 위상과 역할을 줄곧 감당해 왔다. 평소에는 군무를 주관하는 관리로서 또는 지방 관아의 목민관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다했으며, 전란이 일어나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외적과 싸웠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 무인들은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이전 시대의 무인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무과시험에 병서강독이 포함괴었던 까닭에 상당한 수준의 문자해독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시가를 지어 부를 정도의 문화향유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 무인들과 비교했을 때 획기적인 변화이자 발전임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무인들은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를 드높이거나 혹은 상대적인 차별로 인한 헛헛한 속내을 풀어내는 시가를 지어 불렀다. 시조와 가사가 주류이긴 하지만, 무인이 지은 한시도 드물게 전해진다. 문인이나 가객이 지은 작품의 수에 비한다면 매우 적지만, 그 속에 담긴 무인들의 뜻과 생각은 결코 녹록지 않다. 흔치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값지다. 따라서 무인들의 기개와 소회가 담겨진 시가들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만하다.

 

 

  성은에 대한 보답과 충성심

  구인후(具仁垕 1578~1658, 80세)는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병사, 어영대장, 도총관,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그는 이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했다.

  그는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이었다. 그런 까닭인지 별다른 기복 없이 순조롭게 승진했다. 그저 순조로웠다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이다.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무신으로서 최고로 영달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도 구인후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겨 우리의 시선을 끈다.     

 

 

  어전御前에 실언失言하고 특명特命으로 내치시니

  이 몸이 갈 듸 업셔 서호西湖를 찾아 가니

  밤중만 닷 드는 소리에 연군성戀君誠이 새로왜라

   - 구인후(具仁垕, 1578~1658, 80세)

 

 

  이 시조 속에는 창작경위를 짐작게 하는 스토리가 들어있다. 화자는 임금 앞에서 큰 실언을 하여 노여움을 산다. 몹시 화가 난 왕은 특명을 내려 그의 관직을 삭탈한다. 갑자기 벼슬을 잃은 그는 이리저리 방황하다 서호西湖를 찾아간다. 서호는 오늘날 절두산 뒤편에 있었던 호수로, 뚝섬 근처에 있었던 동호東湖와 서로 대칭되는 곳이다. 한적한 서호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화자는 자신의 실언을 뉘우친다.

  여기서 시적 화자가 말한 '실언'이란 진짜로 말실수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임금에 대한 간곡한 '직언'이었을 게다. 임금은 무치無恥의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신하는 '직언'을 '실언'이라 하면서 임금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다. 이것이 바로 신하된 자의 도리였다. 뉘우침은 곧 충성심으로 이어진다. 호숫가의 닻 올리는 소리를 듣고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새롭다고 토로한다. 이것이 구인후가 남긴 시조 속에 담긴 대강의 스토리이다.

  안정된 벼슬살이를 계속했던 구인후의 생애에 비추어 볼 때, 이 시조는 그가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옹호하다 쫓겨난 1654년쯤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삭탈관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인조는 그를 불러 좌의정에 앉혔다. 구인후 역시 실언 아닌 실언을 자성하며, 임금에 대한 충성을 재삼 확인한다. 이러한 구인후의 속내가 짧은 노래 속에 잘 표현된 작품이라 본다. (P. 13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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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청춘2019-가을호 <고전산책 ⑮> 에서

  * 정재민/ 1964년 경기 양평 출생,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저서 『한국운명설화의 연구』『군대유머 그 유쾌한 웃음과 시선』『리더의 의사소통』『문예사조』『사관생도의 글쓰기』『문학의 이해』『불멸의 화랑』등, 현재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겸 교수학습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