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와 마주하다對影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 56세)
연못 가에 나 홀로 앉았다가
우연히 못 속의 한 스님과 만났네
묵묵히 웃으며 서로 바라보기만 하노라
그대 말 걸어도 대응하지 않을 것이기에*
-전문-
*『無衣子詩集』下券(『한국불교전서』[이하 '한불전']제6권, p.56-a03)
▶ 내 삶의 지침, 진각 혜심의 선시(발췌)_ 동명 스님/ 시인
약 700여 년 전의 선승 진각 혜심은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는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을 마치 우연히 만난 제3자인 것처럼 말합니다. 혜심과 그림자는 서로 마주 보며 말없이 미소만 짓습니다. 왜? 어차피 말 걸어봐야 대응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19세기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73세)은 자신의 그림자와 줄기차게 대화합니다. '나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 또한 믿게 되리라"라는 확신에 따른 것입니다. 윤동주와 휘트먼이 모더니즘의 자아의식을 보여준다면, 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세상을 다녀간 진각 혜심의 자아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포스트모던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나 자신과 그림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곧 그림자처럼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임을. 선시는 조용히 무아無我사상을 노래합니다. 어떤 경전이 자아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이토록 무심하게 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금강경』32분에서 말하는 "가르치지 않는 듯한 가르침"(yath na prak術jayet, tenocyate sa?prak術jayed iti. 마치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하나니, 그것이 이른바 '상세히 가르치는 것'이다.)이 바로 이것일 텐데, 선시의 가르침은 그 방식까지도 무아적無我的입니다.(p. 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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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문학』2019-여름호 <특집 '마음의 피뢰침 : 선禪과 시詩' 세미나>에서
* 동명 스님/ 1989년『문학과사회』로 등단, 2010년 해인사에서 지홍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시집『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미리 이별을 노래하다』『나무 물고기』『고시원은 괜찮아요』『벼랑 위의 사랑』, 산문집『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등,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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