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후에를 떠나며/ 서정학

검지 정숙자 2019. 10. 31. 00:53

 

 

    후에를 떠나면

 

     서정학

 

 

  먼 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시든 연잎이 눈물겹게 꽃대를 밀어 올리는 연못가,

  해자垓字에 얹힌 낡은 다리를 건너

  반쯤은 다시 쌓은 성문을 지나면

  한때 금빛 용이 날아오르던 붉은 기와의 궁과 전각들.

  낯선 습한 바람을 따라 걷는다.

  총격과 포탄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있는

  무너진 담과 종묘와 궁궐터가 보이고

  뜨거운 대낮에 지는 꽃 피는 꽃.

 

  新韶淑氣滿春成

  아름답고 맑은 봄기운이 성에 가득하다는

  황제가 지었다는 시 한 구절이

  쓸쓸해 보이는 늦은 오후

  황성에는 주인은 없고 객들만 번잡하다.

  추녀 위 잡상雜像으로 올려진 늙은 기린 한 마리

  눈 부릅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데

  구름무늬가 조각된 돌기둥에 기대어 홀로 꿈꾸어 본다.

  후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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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정신』2019-가을호 <신작시>에서

  * 서정학충북 충주 출생, 1986년『심상』신인상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반달과 길을 가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