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파도에게/ 김승희

검지 정숙자 2019. 10. 31. 00:39

 

    파도에게

 

    김승희

 

 

  파도야 반갑다

  너는 이 동네 파도가 아니지

  난민처럼 여기저기 떠돌다가 먼 데서 온 거지

  다른 세상 보고 싶어

  멀리 멀리 바다에서 떠나 지금 막 여기 닿은 거지

  일어서서 달려와서 너는 찬란한 물보라로

  하얗게 여기서 죽는다

 

  파도야 고맙다

  너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

  차디찬 세계의 차단을 뚫고 온 세상 어디를 떠돌아다니다가

  침몰을 뿌리치고 땅이 그리워서

  울며불며 여기 도달한 거지

  땅에는 내가 있고 밭이 있고 논이 있고 산이 있지

  아름다운 도시도 있지

  주소 없는 타향 곳곳이 네 고향이지

 

  순간, 지금 막, 서로를 바라보는데

  일어서면서 파도가 하얀 물보라가 종소리처럼 흩어지네

  하얀 물보라 속에는 무수한 물거품의 얼굴이 들어있네

  물거품 안에 물거품의 얼굴을 감싸며 갈기를 치며 파도가 일어서네

  얼굴을 감싸며 나도 거품이 흐르는 푸른 거울을 바라보네

  미끄러운 거울이 파도 안에서 나를 놓치고 마네

  나도 그만 너를 놓치고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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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정신』2019-가을호 <신작시>에서

  * 성은주/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19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