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4회 박두진문학상 수상작(시)/ 수상소감>
얼음렌즈
차주일
나는 꿈을 꾸고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지만
꿈은 내 능동이 아니지.
여러 등장인물로 한 편 이루어진 꿈은 피동,
원하든 그렇지 않든 구성되는
내 삶은 타자가 주인공이 되어 지나간 막간일 뿐.
능동과 피동이 동거하면
통념을 넘어서는 통설이 태어나지.
나 역시 미완성 각본 어디쯤에서
누군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리.
인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눈송이를 모으고
빙산을 갈아 볼록렌즈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
햇빛을 모아 불씨 하나 길들이는 사람이 있어,
나는 잠깐 꿈 밖으로 태어나
사랑을 제공하는 천직을 가졌으리.
내 수정체에 든 온갖 피사체로
너라는 한 점을 어렵사리 착상시키고
체온으로 그린 입체를 탁본하여
내 해몽대로 네 얼굴이 생겨났으리
네가 오늘 사용할 내 표정을 고르기 때문에
내 배역은 사후에도 전생이리.
-전문-
* 심사위원: 조남철(심사위원장, 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장, 혜산 박두진문학제 운영위원장)
* 박라연(시인, 제5회 박두진문학상 수상자)
* 김병호(시인, 협성대학교 교수)
* 박희헌(시인, 한국문인협회 안성지부장)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
▣ 수상소감
저는 잘 까불고 농도 잘 치는 사람입니다. 이중성을 가진 성격 때문입니다. 제 외로움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저도 모르게 제가 나서서 까불고 우스개 떠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조용해졌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혜산 박두진문학상의 순기능 때문입니다.
저는 하찮은 일과 자존심을 바꾸기 싫어 2010년 6월 7년여 근무하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퇴직하고 이틀 만에 집을 나왔습니다. 9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하루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홀로를 찾아 외로움이란 주격을 부여하며 시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펜촉처럼 발목을 꺾어 첫걸음을 딛는 외로움을 만나진 못했습니다. 딱 한 번 지극한 외로움을 만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두려워서 도망쳤습니다. 그때 저는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마구 걸었습니다. 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집이 생기고 터진 물집 속에서 또 물집이 생기고 발톱 두 개를 잃어가며 8일을 걷다 보니 충북 옥천 선산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혜산 선생님의 가편 묘지송의 화자같은 외로움을 심장으로 가진 홀로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나"라는 친구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목숨마저도 내려놓은 제법 수도자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깨닫게 하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나를 이루지 말고 타인이 나를 이루게 하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때 불현듯 다음과 같은 스승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힘에는 권력과 매력 두 가지가 있다. 권력은 자신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힘이자 폭력적으로 남의 힘을 빼앗아 자신을 구축하는 힘이며, 매력은 남이 자연스럽게 내게 부여해 주는 힘이다. 그러므로 사후에도 생존하는 진정한 힘은 매력일 것이다.'
저는 혜산 선생님께서 위와 같은 삶으로 문학을 살아내셨다고 생각합니다. 혜산 선생님은 스스로 권력과 헤게모니에서 멀어지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전파해야 하는 것이 문인의 의무라고 주장해 온 제게 혜산 선생님의 삶은 작금을 바로 바라보게 합니다. 돌아보십시오. 헤게모니의 이면과 배후로 소외된 문인들이 오히려 헤게모니를 인정해 주고 기생의 자격을 얻는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스스로 식민이 되어버리는 이 견고한 패러다임을 걱정하다 보면 혜산 정신이 더더욱 그리워집니다.
몇 년 전 제법 큰 상금이 달린 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적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번 혜산 박두진문학상은 정중히 받들겠습니다. 이 영광은 십여 년 동안 방기해 온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출장보고서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가없는 이 영광은 '그리도 가족 밖으로 떠돌기만 하더니 뭘 하고 있긴 했네.' 이 정도 혼잣말이 되어 아내의 함구 속에 순장될 것입니다. 저는 그녀의 함구 속에서 사후를 살아 어느 날 시인으로 발설되면 좋겠습니다. 여자를 잊고 산 한 여자에게 자신의 주격을 딸아들에게 내어주고 외로움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감히 오늘의 영광을 봉헌합니다.
이렇게 진심을 말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혜산 박두진문학상 관계자께 정중히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부족한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오셔주신 분들께 매력을 숭상하는 시인이 되어 조금은 달라지는 세상을 지향하겠다는 약속을 감히 답례로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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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회 혜산 박두진 문학제> 팸플릿에서
* 2019. 10. 26(토). 오후 3시~5시
* 안성문예회관 대강당
* 주최 · 주관: 안성문인협회
* 후원: 안성예총, 안성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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