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성현_ 남겨진 시간에 대한 예의,...(발췌)/ 그런 일이 있었다 : 김병호

검지 정숙자 2019. 10. 22. 22:20

 

 

    그런 일이 있었다

 

    김병호

 

 

  두고 온 것이 많은 어제는 꽃나무의 어둡고 끈끈한 허기와 닮았습니다 고모는 봄을 다 산 꽃나무가 그을음 속에 시퍼렇게 숨는 것도 허기 탓이라 했습니다 새로 나고 드는지 이십삼 층 베란다엔 하루 내내 사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르렁 그르렁 아니 그랑 그랑, 녹슨 미닫이를 기어이 여닫는 소리 같기도 하고 미움 없이 상처를 핥는 짐승의 신음 같기도 한데,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더 무섭다고 말하던 고모는 꼽추로 팔순을 넘겼습니다 고모를 볼 때마다 먼 곳을 오래오래 걸어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낳고 키운 것 하나 없다고 비밀도 함부로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 물녘만 서성이던 고모를 보면 어쩌다가 서서 자는 사람처럼 깎아놓은 지 오래된 사과처럼, 어제가 멈춘 게 아니라 한꺼번에 지나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모의 젖은 흙발자국이 마르는 시간과 고모가 사다 준 딸기 맛 아이스바가 녹는 시간의 사이에는 또박또박 건너오지 못한 어제가 있었습니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쉰이 되어도 나는 다만 어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꺼워져 가는 어제의 바깥이 저물녘이 다 되어도 말입니다

  -전문, 『공정한 시인의 사회』2019-6월호

 

 

  ▶ 남겨진 시간에 대한 예의, 혹은 압화押花된 '풍경'의 기록(발췌)_ 박성현/ 시인

  시인은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도 고모처럼 두고 온 것이 너무 많다. 꽃나무에 맺힌 눅눅한 허기도, 그을음도 모두 손에 잡힐 듯하다. 그가 무심히 흘려보낸 '어제'도 고모가 자꾸 되살려내는 '어제'와 같이 멈추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지나간다. 흑백 영사기처럼 길고긴 손톱자국이 나고 군데군데 멍의 형체로 시꺼멓게 타들어갔어도 시인과 고모가 공유한 무수한 시간들이 자꾸자꾸 지나간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쉰이 되어도" 매번 다른 속도와 무게로 시인의 오늘을 뭉텅뭉텅 지나간다./ 이처럼 김병호 시인의 문장은 시간을 되찾으려는 의지와 함께, 그 '시간'에 새겨진 모든 감각들이 장소를 갖고 되살아나는 경이로움을 고요하지만 절박하게 표현한다. 그것은 순결한 영혼에 새겨진 영롱한 핏방울이자 가장 일찍 눈을 뜨는 새의 울음이다. 그는 이 모든 이미지를 '시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변형시키며 고모의 '어제'로, 그 찬란한 생의 발아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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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2019-가을호 <탐구, 지냔 계절의 좋은 시> 에서

  * 김병호/ 2008년《문화일보》로 등단, 시집『달 안을 걷다』『백핸드 발리』등

  * 박성현/ 2009년《중앙일보》로 등단, 시집『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