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갈나무 당신
배세복
떡갈나무 우수수 몸을 텁니다 가을 동안 떨켜를 장만하지 못한 나무, 아무리 흔들어대도 마른 잎 한 장 날리지 못합니다 그해 여름은 장마가 길었지요 당신과의 기억을 말릴 새 없었습니다 물 가운데서 당신은 허우적거렸으니까요 아무리 뒤돌아서려 해도 아른거리는 얼굴, 그래서 무수히 많은 잎을 만들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당신 향해 뻗을 수밖에 없던 나의 손가락, 가을은 천천히 찾아왔죠 서서히 떨켜를 준비했는데요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떨구기 위해 수없이 연습했던 거죠 밤마다 새로 생길 생채기에 단풍처럼 물들어보았는데요 아침 발개진 눈에도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하지만 어리숙한 건 나였죠 겨울 되어도 당신은 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제야 내가 당신에게 나무가 아니라 잎새였음을 알게 되었죠 떨켜 없이 매달린 채 말라버린 나뭇잎, 겨울바람에 갈기갈기 찢어져야만 품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죠 바람이 다시 뺨을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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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몬드리안의 담요』에서/ 2019. 10. 1. <시산맥사> 펴냄
* 배세복/ 충남 홍성 출생, 2014년《광주일보》로 등단, <VOLUME>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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