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김현숙

검지 정숙자 2019. 10. 6. 02:48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김현숙

 

 

  길 하나를 내어주며

  신은 곁가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불거지는 어떤 원原원이든

  자르면서 키가 자랐다

  한 뼘씩 자란 키 속에

  사랑이, 이별이 들어있다고

  까만 밑줄 그어놓온 날들

  이런저런 추위에

  달님 별님 따뜻한 입술 대는 곳

 

  이 낯선 숲에 열외열外 하나

  울컥거리는 파도로 밀려왔다

  바깥은 온갖 경보로 휘청거리는데

  여기는 정연整然한 안쪽

  환한 걸음사위에 어떤 꼼수도 없다

  각자의 생이 곧고 길고 서늘하게

  단단한 자신의 회초리가 되어 꽂히자

  산이 일순 하얗게 점멸點滅한다

 

  번쩍 눈을 떴다.

  흰 산이 된 자작나무 숲에서

      -전문-

 

 

  해설한 문장: 위 인용 시편은 신이 정해놓은 운명성에 대한 강한 체념과 긍정, 그리고 순응하는 김 시인의 생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가! 목숨 있는 인생들에게는 제각각 신이 정해놓은 생의 길이 있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현재의 삶에 의문을 갖게 되고 지금과 다른 삶은 없는가? 신을 향한 반항과 야속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정해진 삶의 형식을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운명성 아니던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레일 위를 달려가고 있는 인생들의 표상인 것을 시인은 일찌감치 깨달았음을 위의 시편은 잘 보여주고 있다.(p. 114.) (김재홍, 문학평론가)

 

   --------------

  * 시집 『아들의 바다』에서/ 2019. 6. 30. <시와시학> 펴냄

  * 김현숙/ 1947년 경북 상주 출생, 1982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유리구슬 꿰는 사람』『소리 날아오르다』등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짜고무신 외 1편/ 서상만  (0) 2019.10.07
새의 말/ 김현숙  (0) 2019.10.06
떡갈나무 당신/ 배세복  (0) 2019.10.04
우로보로스*/ 배세복  (0) 2019.10.04
고등어/ 석민재  (0) 2019.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