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라도 물고 오든가
석민재
찬송가 없이도 경건할 수 있지만 월요일은 처음부터 우울하니까요, 개는 배가 고파야 도둑을 지킨다지만 이 쓸 게 없는 가난은 정말, 우리도 뉴스를 듣고 있어요, 이제는 재치도 단어도 눈물도 사라졌어요
갑자기 땀이 나네요, 고름이 가득 찬 아침이라는 말이 있어요, 없어요, 사실은 그런 말, 책도 따지고 보면 종이 위에 남겨진 검은색 잉크뿐이잖아요, 오, 오, 놀라운 힘을 가졌다지만, 살덩어리잖아요 당신의 살, 나의 살, 억지로 기운 낼 필요 없어요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시처럼 건조하고 의미 없는 오후가 오고 있지만, 불이 난 집이 우리 집이라 해도 서운하지 않을 것처럼 앉아서 찬송가만 불러도, 광기 없이는 창조도 없데요, 법률, 정의, 도덕, 같은 건 아무짝에도 소용없데요,
걱정은 돼요 차마 정리하지 못한 짐처럼 난처한 표정들, 겁만 주는 건 당신답지 않아요, 감정을 털어놓으시면 꼬리가 길어서 밟힐 거 같고 혼자 있는 법도 배워야 하는데 내가 나를 나꾸 잠입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후렴이 없다면 5절이나 되는 찬송가를 어떻게 외울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일진이 안 좋지만 시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떠오르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막강하지만, 이 립스틱을 바르면 각오가 설지도 모르겠어요, 도망치든가, 아니면,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쓸 게 없는 가난", "시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상태야말로 시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불이 난 집이 우리 집이라 해도 서운하지 않을" 만큼의 광기를 불러오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법률, 정의, 도덕 같은 건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만큼의 시라는 광기에 대해.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이 거대한 살이 되어 막강한 힘으로 시인에게 엄습해 오는 순간이 있다. 시인은 그 순간 무력이라는 막강한 상대를 마주한 채 마치 "쥐라도 물고" 올 기세로 거울 앞에 서서 립스틱을 바른다. 핏빛에 가까운 빨간 입술 사이에서 시인의 명랑한 음성이 들린다.(p.127-128.) (전영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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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에서/ 2019. 9. 20. <파란> 펴냄
* 석민재/ 1975년 경남 하동출생, 2015년 『시와사상』으로 & 2017년 『세계일보』로 시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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