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이위발

검지 정숙자 2019. 8. 17. 03:16

 

<에세이>

 

    울잍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이위발

 

 

  얼마 전 밭일을 마치고 정자에 쉬고 있던 옆집 몽실할매를 만났습니다. 올 농사 이야기를 하던 중 할매 손을 보면서 유난히 곱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된 건 손톱이 봉선화 물로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엔 주름이 겹겹이 쌓여 있었지만 이쁘다는 소리에 손을 감추던 얼굴엔 홍조가 피어올랐습니다. 어릴 적 봉선화 잎을 따서 돌 위에 올려놓고 백반을 조금 뿌리고 치면 진홍빛 물기가 번져 나왔습니다. 그것을 손톱 위에 올려놓고 비닐을 덮고 실로 감싼 후 하루저녁 자고 나면 손톱이 발갛게 물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봉선화를 언제부터 심었는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동국이상국집』에 "오색으로 꽃이 피고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열매가 자라 씨가 터져 나간다는 봉상화鳳翔花"가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 이전부터 봉선화를 널리 심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꽃의 생김새가 마치 봉을 닮았다고 해서 봉선화라고 부릅니다.

  광복절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일제강점기 때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입니다. 봉선화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사연이 평양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홍난파 선생과 그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이웃집에 살았던 '봉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와의 만남과 이별에 얽힌 사연이었습니다. 홍난파 선생이 「봉선화」를 작곡한 후 시인 김용준이 이 곡에 가사를 붙였습니다.

  당시 해외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가 귀국한 홍난파는 서울에서 대중 계몽에 이바지할 잡지를 발행했는데 자금난으로 폐간되자 우울한 심정을 안고 향촌 마을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 사이 고향 마을은 피폐해져 있었는데 이웃집에 사는 봉선이란 처녀가 찾아와 바이올린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학교도 가지 못하던 봉선이는 홍난파에게서 글과 노래를 배웠고, 봉선이는 홍난파를 자기 오빠처럼 따랐던 것입니다. 그때 봉선이는 남달리 봉선화를 사랑했는데 해마다 자기 집 뜨락과 홍난파의 집 울타리 밑에도 봉선화를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방직공장으로 일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봉선이는 이별을 앞두고 홍난파를 찾아왔습니다.

  홍난파는 「아리랑」을 연주하려고 했으나 가슴 저미는 서글픔과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새로운 곡이 떠올라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즐겨 불렀던 가곡 「봉선화」입니다.

 

  봉선화를 시적으로 잘 표현한 김상옥 시인의 「봉선화」란 시입니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이 시 속 화자는 장독간에 피기 시작한 봉선화를 보고  시집가서 멀리 사시는 누님을 생각합니다. 편지를 적어 보내면 웃다 울다 하시며 고향을 그리워하실 누님을 떠올립니다. 봉선화 꽃잎 따 손톱에 물들이던 그 누님과의 옛 추억을 그리워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고향 집 마당에 서 있게 됩니다. 어린 시절 돌담 밑에 피던 봉선화로 물들여주고 외려 머슴아가 손톱 물들였다 놀려먹던 누이를 생각나게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봉선화」설화도 있습니다. 고려 충선왕은 몽골에서 보내온 공주보다 조비라는 여인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고려를 지배하던 몽골의 미움을 받아 왕위를 내놓고 몽골로 불려갔습니다. 어느 날, 충선왕은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타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소녀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하도 기이하여 궁궐 안에 있는 궁녀들을 모두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소녀가 손가락을 흰 헝겊으로 동여매고 있었습니다. 왕이 소녀의 신분을 물어보니 그녀는 고려에서 온 공녀인데 집이 그리워 울다가 너무 울어서 눈병이 났고, 열 손가락은 봉선화의 꽃물을 들이기 위해 헝겊으로 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충선왕을 극진히 섬기는 바람에 관직에서 쫓겨나고 자신은 공녀로 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계시는 충선왕에게 들려주려고 오랫동안 준비한 가락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락은 왕께서 성공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노래에 붙인 가야금 가락이었습니다.

  왕은 그 노래에 감명하여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품고, 원나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도와준 공으로 고려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에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오른 뒤에 그 갸륵한 소녀를 불러오라 했으나 그녀는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왕은 소녀의 정을 기리는 뜻에서 궁궐 뜰 앞에 봉선화를 심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봉선화는 우리들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한 서정적인 꽃입니다. 아맘때가 되면 꽃물들인 소녀의 얼굴이 옆집 할매의 얼굴과 겹쳐져 봉선화꽃으로 다가오는 그리운 계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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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2019-가을호 <시에 에세이> 에서

  * 이위발/ 경북 영양 출생,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어느 모노드라마의 꿈』『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산문집『된장 담그는 시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