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음악에세이]그래도 천천히/ 유혜자

검지 정숙자 2019. 8. 26. 20:07

 

 

    그래도 천천히

      - 브루크너의 마지막 교향곡

 

     유혜자/ 수필가

 

 

   안스펠덴의 성 플로리안 성당(St. Florians Collegiate Church), 브루크너 오르간이 올려다 보이는 곳의 바닥에는 안톤 브루크너(Bruckner, Josef Anton 1824-1896)라고 새긴 묘지 석판이 있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바탕이 되어 있는 장중하고 깊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가 울려 나올 것 같아 올려다보았지만, 7천 개가 넘는 파이프와 11m 높이의 거대한 오르간은 차가운 기운만을 내뿜는 듯했다. 브루크너는 고향을 떠나 살 때도 자신 음악의 중심인 신앙과 창작활동의 바탕이 된 성당과 수도원에 자주 들렀고, 유해를 오르간 밑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거기 묻혔다. 1930년부터는 오르간도 브루크너의 오르간으로 부르고 있다.

   엄숙하기만 한 성당에 브루크너 영혼의 잔잔한 목소리 같은 교향곡 9번의 평화로운 3악장을 은은하게 틀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왔다. 브람스와 더불어 베토벤의 정통 후계자로 독일교향곡의 전통을 이은 브루크너가 소년합창단으로, 조교사로 청소년 시대의 대부분을 보낸 노란 벽과 빨간 지붕의 수도원 건물과 성당, 꽃들은 져버리고 싱싱한 푸른 줄기의 식물들이 너울거리는 정원엔 세상을 밝히는 생기 있는 음표가 숨어 있는 듯했다.

   린츠 근교의 작은 마을인 안스펠덴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음악을 배워 일찍이 오르간 주자로, 작곡가로 활동했지만 그의 이름은 '천천히' 알려졌다. 그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처럼 교향곡 9작품을 남겼는데 교향곡 9번(D단조)은 3악장까지만 쓰고 완성을 못한 채 돌아갔다. 3악장의 악상기호인 '아다지오'의 뜻은 '천천히 장중하게'이다. 늑장을 부리다가 뒤늦게 곡을 써내는 버릇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브루크너는 18살 때부터 미사곡을 쓰고 오르간 주자로 명성을 얻으면서 틈틈이 종교음악과 합창곡 등을 썼다. 32세에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로 전념하여 빈에 가서 음악이론도 배우면서 미사곡과 종교음악을 썼고, 교향곡 1번을 발표한 것은 40세 때였다. 다시 50세에 발표한 교향곡 2번과 그 이후의 교향곡들이 악평을 받고, 60세에야 교향곡 7번으로 호평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천천히' 빛을 본 것이다.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도 그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브루크너의 작품에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무관심하거나 냉담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품을 써도 적극적으로 초연初演하여 알리려고 하지 않고 초고를 넣어 두었다가 생각나면 고쳤기에 그의 작품은 오리지널과 개정 1호, 개정 2호 하는 식으로 구별해서 쓰는 수가 많다. 촌티 나는 풍모와 무뚝뚝하게 제몫의 일만 해내는 그를 시골뜨기라고 경멸해도 굴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실의에 빠지지 않고 더 큰 능력을 구하며 기도했고, 신께 바치기 위해 쓴 작품, 신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이 승화된 작품이 사랑받아 자주 연주되기를 바랐다. 경건한 신앙생활로 일관하며 음악에 관한 일 외에는 무관심했던지라 자신의 음악에 악평을 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은 신에 의해서만 정당하게 평가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작곡가들과의 교제도 별로 없었던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감동, 존경하게 되어 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바쳤다. 빈을 방문한 바그너는 그 작품이 꼭 공연되어야 한다고 공언하며 사기를 돋워 주었으나 공연결과는 실패였다. 악장이 끝날 때마다 청중이 자리를 떠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10여 명만 남고, 최후엔 그의 강의를 듣던 빈 대학의 제자들만 남아서 브루크너를 위로했다.

   좌절하지 않고 잇달아 대작을 써낸 그는 60세 되던 1884년에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2세에게 헌정한 교향곡 7번이 명 지휘자 니키시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에서 초연,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서야 냉담하던 빈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게 되었지만 그의 건강은 나빠졌다. 여러 번 개작하여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바친 교향곡 8번도 성공이었다. 빈 대학의 학생이었던 음악 평론가 카를 코바르트가 학생 시절에, 브루크너가 교향곡 8번에서 따온 부분의 피아노 연주 때 보았던 모습을 소개했다.  

   "짧은 다리와 병약하고 시골스러운 브루크너의 풍모는 간 데 없고 마침내 거인이 우리들 앞에 서 있었다. 두 눈은 불 구름처럼 빛나고 입술은 폭풍처럼 환성을 지르며 홀연히 불멸의 음을 예고하는 거인이었다. 초라한 교실은 하느님을 위하여 연주하고 있는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기도, 예술가의 가장 깊은 신앙, 행복감, 창조적인 인간의 무아지경은 불타올라 영원히 빛나는 숭고한 삶에까지 승화되어 갔다."고 회고했다.

   63세(1887년)에는 교향곡 9번을 '사랑하는 신에게' 헌정하려고 쓰기로 했다. 계속 교향곡 9번 작품에 대한 구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9년이란 세월이 지나도록 겨우 3악장까지만 완수했다. 8번 작곡과 개작에 힘을 써 건강이 악화된 그는 69세에 유서까지 썼다. 열렬히 기도하며 3년을 더 살았는데 1896년 숨지는 날 오전까지 9번의 끝 악장을 스케치한 뒤, 오후에 숨을 거뒀다. 그가 신께 바치려고 총력을 기울였던 9번은 그의 별세 7년 후 제자 뢰베 지휘로 빈에서 초연되었는데 생전 그의 바람대로 「테 데움」을 4악장 대신 연주했다.

   숭고, 장엄하며 신비함이 감도는 제1악장, 거인의 발걸음과 같은 스케르초와 우미한 트리오가 대비되는 2악장, 3악장의 아다지오는 '천천히 장중하게'로 브루크너가 깨달은 무아의 경지를 느끼게 할 만큼 평안하다. "그의 작곡은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 속에서 오직 영원한 것만을 생각하고 그 불멸의 존재를 위하여 작곡하였다."라고 한 푸르트뱅글러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바람과 시간은 이집트 파라오의 거대한 무덤도 풍화시키는데, 나이든 지금도 바람 때문에 불안정한 채 삶의 정수리에서 겉돌고 불모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깝다.

  교향곡 9번을 위해서 9년이란 시간을 보낸 브루크너에게 다시 태어나도 그렇게 시간을 많이 소모하며 작곡할 것인가 묻는다면, 창조적인 자신의 능력배양을 위해서 '그래도 천천히'라고 역설할 것 같다. (2008)

 

 

   * 블로그주

   베토벤-------1770~1827, 57세

   슈베르트-----1797~1828, 31세

   바그너-------1813~1883, 70세

   브람스-------1823~1899, 64세

   브루크너-----1824~1896, 72세

 

   음악 지휘자/ 뢰베------------1865~1925, 60세

   음악 지휘자/ 푸르트뱅글러---1866~1954, 68세

   음악 평론가/ 카를 코바르트---1876~  ?

 

   루드비히 2세---------1845~1886, 41세

   프란츠 요제프 황제---1830~1916, 9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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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에세이『음악의 에스프레시보』 2011. 9. 30. <선우미디어> 펴냄

  * 유혜자/ 충남 강경 출생, 1972년 월간『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사막의 장미』등, 음악에세이『음악의 숲에서』『음악의 정원』등, 수필선집『꿈꾸는 우체통』『파가니니와 냉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