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새로운 번역의 시대/ 함성호

검지 정숙자 2019. 7. 19. 17:41

 

 

    새로운 번역의 시대

 

    함성호/ 시인

 

 

  인문人文이라는 말은 1800년대 말 일본에서 'Humanism'을 번역한 것이다.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에서 한자에 대한,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역할은 각기 다르다. 기원전 중원에서 한자가 발명되고, 중국이 이를 발전시키고 일본과 한국이 이를 받아서 썼다면, 19세기부터는 일본에서 이 한자를 이용하여 서양의 서적들을 일본의 상황에 맞게 번역하여 중국과 한국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20세기에 한국은 한자 대신에 한글을 주요 표기 수단으로 삼았다. 지금 한자문명권은 일본어 번역어와 한자 번역어를 공통으로 받아들여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서로 다른 문화 차이로 일본 번역어의 폐해가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일본의 번역 작업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그만큼 정치한 측면이 있다.

  일본의 번역 작업은 에도시대(江戶시대: 1603~1867) 말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막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을 어떻게 지배하는가였다. 농민들로부터 효율적으로 세금을 받아내기 위해 막부와 각 번은 농민들의 세세한 것까지 통제했다. 쌀은 세금으로 거둬들일 것이니 많이 먹지 않도록 보리나 무 등을 섞어 먹으라는 주식에 대한 통제, 술이나 차를 사 마시지 말라는 기호에 대한 통제, 옷은 마나 무명 이외의 것을 입지 말라는 의복에 관한 통제들이 행해졌다. 막부는 소수의 무사가, 많은 농민과 쵸오닌(町人 : 평민)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농공상(武士, 農民, 職人, 商人)이라고 하는 신분제도를 만들었고, 상인계급의 아래에는 다시 「에타 · 非人」이라 불리는 천민계급이 있었다. 농민과 평민은, 무사와 달리 성도 없고, 다이묘의 행렬과 마주치면 길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이러한 상 · 하 관계는 무사사회에서는 주인과 케라이(家來)의 주종관계를, 가정 내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최상위 계급인 무사는 무예나 학문을 닦으며, 허리에는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농민과 초닌(평민; 町人)들이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 자리에서 베어 죽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불법이었지만, 밤에 길을 가는 행인을 연습 삼아 베어 보는 수습무사의 살인이 저질러질 정도였다. 에도 막부가 전국을 지배하며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자, 농민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을 넓히고, 목화, 유채기름 등을 재배하여 상인에게 팔았으며 비단, 술, 종이 등의 수공업도 발달했다. 쌀이나 대량의 물자를 운반할 때는 배를 주로 이용했고, 이로 인해 항로도 발달했다. 전쟁이 없어지고, 상업이 발달하자 학문과 예술 활동도 활발했다. 막부는 주자학을 보호하여, 막부에 학문소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에도 후기에 오면 사정이 악화되지만, 서양의 학문과 지식은, 쇄국을 하는 동안 막부가 무역을 허락한 네델란드로부터 전해졌다. 이로 인해 난학(蘭學; 란카쿠)이 성행했다. 이후 1968년, 메이지텐노우(明治天皇: 1852~1912)는 '신에게 맹세한다'라는 형식으로 신정부의 정치방침(五箇條の御警文)을 발표하고 이제까지의 에도(江戶)라는 지명을 토쿄(東京)로 고치고, 연호年號를 메이지(明治)로 칭하면서, 수도首都를 교토(京都)에서 도쿄(東京)로 옮겼다. 명치시대에는 자유주의 및 개인주의 등의 서구의 근대사상이 들어와 인간은 모두 자유 평등하고,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일본의 번역 사업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일본 상황에 맞는 적용 가능성, 단어 선택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여러 번역어 중에서 그 사회에서 살아남은 말들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소위 '일본 한자'인 것이다. '공간', '사회', '윤리'라는 말이 만들어졌다.새로 만든 말도 많지만, 참고한 고전들 역시 『예기』,『논어』,『주역』,『도덕경』등 다양하다. '인문'이라는 단어 역시 아무렇게나 만든 말이 아니라

  유협(勰; 465~520)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의 첫 문장에서 따 온 말이다. '하늘의 무늬는 천문天文이고 땅의 무늬는 지문地文이고 사람의 무늬는 인문人文이다'. 여기에서 휴머니즘을 인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정확한 번역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文'은 갑골문에서 사람에게 문신을 새기는 도구의 상형문자다. 무늬를 새기는 도구고, 곧 무늬다. 흔적이며 남아 있는 얼룩이다. 그래서, 인문이란 사람이 하는 짓이다. 철학, 문학, 수학, 과학이 모두 사람이 하는 짓이었다.(지금은 기계가 한다; 機文; 모미무늬) 이것은 근대 이전의 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구가 근대를 기획하면서 서양과 동양은 다른 길을 걷는다. 근대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말 그대로 기획되었고, 모든 물적 토대를 변화시켰다. 인간다운 삶이라는 걸 정의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 물적 환경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에 이런 예는 없었다. 학문은 전문화되었고, 산업은 조직적이고 기계화되어갔으며 인간 역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과학이 아닌 과학기술의 급성장이 이루어졌고, 서구는 넘쳐나는 생산물들을 팔기 위해, 그리고 모자란 자원을 더 갖기 위해 식민지 쟁탈에 나선다. 과학이 인문에서 떨어져 나가고, 인문학도 분화되었다. 그러나 동양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19세기의 서세동점 현상은 분화되어 전문화된 인문의 효율성이 통합적 인문에게 거둔 승리였다. 우리에게 전문성의 신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19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당면과제는 이러한 전문성을 배워 서양과 대등하게 겨루는 것이었다. 통합적인 인문은 낡고 타파해야 할 불편한 유물이었다.

  여기에서 한자문명권에 속한 중국, 일본, 한국의 입장이 또 갈라진다. 중국은 서구를 배워 다시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갔다. (중국에서는 전통이라는 말이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생활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은 섬나라의 특성으로 지역적 애착이 강했고, 오히려 민족, 국가 의식이 약했기 때문에(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전통보다는 토속성을 보존하며 근대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한국의 양상은 앞의 두 예와는 사뭇 달랐다. 한국은 중앙집권체제가 오백 년 동안 이루어졌던 나라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국가의식도 강하다. 어떻게 보면 훨씬 자기 전통에 보수적인 것 같지만, 그 보수성은 힘의 논리 앞에서 무너졌다. 전통이 민족과 나라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알자 상황은 급회전한다. 다들 서구적인 것으로 쏠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전통과의 거의 완전한 단절 위에서 근대화를 이루게 된다. 전통적인 가치들은 낡고, 음험하고, 고리타분하며, 심지어는 이단이고, 사교였다. 마지막으로 한문과 결별하며 인문의 전통도 끊겼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조선이 충격을 받았던 근대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이 충격을 받았던 근대와, 지금의 한국이 충격을 받았던 근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이 충격을 받았던 근대는 서구열강이 이뤘던 근대였다. 식민지 시대는 일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이다. 한국은 미국과 똑같이 닮아간다. 결론적으로 한국은('아직'이 아니다) 근대 이전에 있거나, 다른 근대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나는 이런 의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가 과연 한국 사람일까? 조선시대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일까? DNA는 연결되겠지만, 우리는 불과 100년 전의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과 문화적, 정신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양음악을 배우고, 서양미술을 배우며, 서양의 가치들을 배우고 자란다. 의식주 모두 진작에 미국화되었고, 연애와 결혼, 장례, 정치, 경제적으로도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점점 더) 미국식으로 결정된다. 만약 지금으로부터 600년 후의 고고학자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지층을 발굴했을 때, 그는 좀 의아스러울 것이다. 불과 100년 차이가 나는 이전의 지층과는 전혀 다른 유물이 발굴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릴 것이다. "이 시대에 이민족의 집단적인 이주가 있었어. 아마 침략 전쟁이었을 테고, 선주민들은 완전히 멸망한 것이 분명해." 그는 확신을 가지고 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할 것이고, 모든 발굴품과 정황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없는 정설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한반도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근대는 근대의 방식을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근대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모든 인간의 삶을 표준화시켜서 적용하는 것이 곧, 모든 인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반도의 상황은 좀 더 극단적이다. 정신문화의 단절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고전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족보가 있다 해도 그것은 난수표와 같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한문은 외국어다. 추사와 옹방강이 한문으로 국제적 교류를 했던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한문을 버렸고, 결국 우리의 고전을 버린 꼴이 되었다. 새로운 번역의 시대가 필요한 이유다. 한국의 상황에 맞는 번역어가 절실하다. 여기에는 한국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한국어와 한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한국어를 표기하는 한글은 독특하고 독보적인 문자다. 15세기 초에 만들어져서 5세기 동안 쓰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식인이 쓰는 문장이라는 것은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때 한문을 썼던 사람들은 당대의 세계인 중국과 대등하게 사상을 교류했다. 퇴계 이황의 철학이 송명성리학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이유도 한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였다. 중국어를 표기하는 한자는 일본, 한국, 베트남에서 널리 쓰였으므로 한자로 생각을 적는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세계적인 학술지에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 같았다.한글 창제 시기의 지식인들은 한글을 쓰게 됨으로 해서 세계어인 한자를 잃을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한글을 쓰게 되면 조선은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그야말로 변방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사대주의도 개입했겠지만 오늘날 영어로 강의하고, 조기영어교육이 성행하는 이유도, 한글창제를 반대했던 15세기 지식인들의 논리와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겹쳐서 한국어는 다시 일본어의 침략을 받는다.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로서 일본어 문장은 중국어 문장보다 훨씬 익히기가 쉽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어 문장으로 사고했다면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들은 일본어 문장으로 사고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어로 글을 썼고, 시를 지었다.

  음악과 회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예술은 언어, 또는 그림(Image)에서부터 출발한다. 언어든 그림이든 거기에는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행위예술(Performance)에도 행위를 예술이게 하는 고유한 문법이 있다. 그 문법을 나는 언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의 처음은 언어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과 예술인은 한국어로 사고하는 것보다 일본어로 사고하는 것이 훨씬 편한 세대들이었다. 물론 한국어도 썼기 때문에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쓰는 다언어 시대였다. 한반도는 유사 이래 계속 다언어 지역이었다. 일본어 이전에 중국어, 혹은 중국의 문법체계로 생각을 적었다. 가끔 오래전에 쓰인 당호堂號를 보면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중국어 발음으로 의성어나 의태어를 당호로 쓴 예들이 흔하다. 일례로 담양의 빼어난 원림인 <소쇄원瀟灑園>의 '蕭灑'는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샤오스오'로 대숲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그대로 딴 것이다.(이것은 내 주장이다. 경기도의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도 요동치는 물소리를 중국어 발음으로 나타낸 의성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다언어 사회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의 다언어 사회와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패한 결과 식민지가 되었고, 침략자의 말과 글이 강요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에는 이 기형적인 다언어의 비애가 스며 있다. 나는 이상李箱의 시에서 이 비애가 극단적으로 나타나 모든 (문법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형식을 파괴하고 다른 형식들을 무차별적으로 전용한 예를 본다. 그리고 이 비애는 이후 한국문학의 기저에 깔린 정서로 아직까지 유효하게 지속된다. 

  한글을 쓰면서 최초로 한국어로 사고하게 된 세대들이 소위 4.19세대다. 1940년생들로 유아기에 해방을 맞이한 세대들이고 한국어 속에서 성장한 세대다. 말과 글이, 그리고 한국어 사고가, 오천 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일치된 첫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은 이러한 첫 한글세대의 감수성을 표현한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첫 한글세대의 등장을 기억하고 있다. 김승옥의 첫 소설을 읽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작가는 마지막 장을 덮고 마당에 나와 먼 데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 세대는 끝났다." 이 단정은 김승옥의 소설이 단지, 한국어에서 나온 감수성이어서 만은 아닐 것이다. 말과 글이 다른 시대가, 이중 언어 사회가 끝난 것이다. 첫 한글세대들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6 · 8혁명이, 아메리카에서는 히피즘이 성행했다. 클래식과 재즈의 시대가 저물고  락엔롤이 당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기다. 이 시기에 한국어로 사고하는 첫 세대가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첫 한글세대의 감수성이 이런 진보적인 사고들과 같이 출발한 것은 나중에 그 방향이 어떻게 갈라지든 자유와, 숭고, 신념, 참여와 진보의 가치를 한국문학에 깊이 새겨 넣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다. 첫 한글세대가 태어난 1940년대로부터도 고작 70년이다. 한국문학은 아직 태동기다. 그런데, 아직 1960년대 문학이 이룬 성과가 눈부신 것은 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다. 이것은 세계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쇠퇴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빛나던 한 시대로부터 저물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정확해져야 한다. 더 정확해져야 한다.

  말과 글이 일치하는 시대에 우리말은 오히려 수많은 언어로부터 영향받고 있다. 일본 번역어, 한자, 프랑스, 독일철학에서 들어온 개념어, 미어의 일상화 등, 라틴어, 그리스어까지, 온갖 언어들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로 인해 남한은 이미 다문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다문화 사회는 오히려 고대에는 더 빈번한 일이었다.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여진, 흉노, 몽골 등 북방의 유목민들과 빈번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말과 글이 일치하고 수많은 언어들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다문화 사회가 이루어지는 때, 문학과 예술은 과연 어떤 문법을 가져야 할까? (p.25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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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시』 2019-여름호 <시인의 에세이> 에서

  * 함성호/ 1990년 『문학과사회』여름호에 시 발표, 1991년 『공간』건축평론 신인상, 시집『56억 7천만년의 고독』『키르티무카』등, 티베트 기행산문집『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건축의 스트레스』『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등, 현재 건축실험집단 <EON>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