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정한과 격조를 읊은 시가들(발췌)
서정을 태동시킨 이별노래 :「황조가」
정재민
모든 사람들이 다 흔쾌히 동의하지 않겠지만, 때로는 이별이 사랑보다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별의 충격은 세차고 갑작스럽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임금에게조차 이별은 어느 날 문득 눈앞에 다가온다.
고구려의 두 번째 임금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은 후, 골천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나라 사람의 딸 치희(雉姬)를 계비로 삼았다. 한꺼번에 두 부인을 얻은 탓일까. 두 여인은 서로 사랑을 다투어 화목하지 않았다. 왕은 할 수 없이 동서 양쪽에 두 개의 궁을 짓고 각기 따로 살게 하였다.
훗날 왕은 기산(箕山) 지방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 두 여인은 크게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었다. "너는 한나라의 천한 여인인데 어찌 이리 무례한가?" 모욕을 당한 치희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길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왕이 달려가 치희를 데려오려 했으나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왕은 나무 밑에 앉아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생각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노니는데
외로워라 이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고,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왕이 지은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진솔한 감정이 전해온다. 물론 유리왕 자신이 지은 순수 창작물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랑을 거절당한 남성의 마음을 잘 담아낸 민요풍의 노래임에는 틀림이 없다. 즐겁고 행복한 꾀꼬리의 모습과 버림받아 쓸쓸한 자신의 처지를 대비시켜 이별의 외로움을 부각시킨 명편이라 할 만하다.
「황조가」는 우리 고대가요의 대표작이자 서정시가의 맏물이다. 우리나라 서정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작품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황조가」는 서정의 발생을 보여주는 노래 또는 서정시가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서정을 배태시킨 단서가 바로 남녀 간의 이별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유리왕은 강제로 치희를 끌고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유리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위와 힘을 앞세우지 않고, 때로는 이별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것! 이 점이 바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한을 보여주는 좌표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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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청춘 』2017-봄호 <고전산책>에서
* 정재민/ 1964년 경기 양평 출생,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저서 『한국운명설화의 연구』『사관생도의 글쓰기』『군대유머 그 유쾌한 웃음과 시선』『리더의 의사소통』『문예사조』『문학의 이해』외. 현재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겸 교수학습 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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