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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미치광이 임금님이 있었네/ 오효진

검지 정숙자 2019. 4. 2. 16:33

 

 

    옛날에 미치광이 임금님이 있었네

 

    오효진/ 소설가

 

 

  1864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왕국에서 키가 2m나 되는 훤칠한 꽃미남 청년이 18살의 나이에 왕의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이 바로 루트비히 2세 Ludwig(1845~1866, 41세)다. 새로운 왕은 외모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을 사랑하는 데다, 농민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걸기도 하는 소탈한 성격이어서 뭇 여성을 비롯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왕은 신망을 잃어서, 자기를 흠모하던 여성들 가운데 40평생 단 한 명도 사랑할 수 없었고, 국민들로부터도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의 님펜부르크(Nymphenburg)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는 지금의 퓌센(Fuessen) 지방에 있는 폐성 호엔슈방가우 성(Hohenschwangau, 일명 '백조의 성')을 사들여 내부를 개조하고 고딕양식으로 재건축해서 아들 루트비히를 그곳에서 살게 했다. 루트비히 2세는 그곳에서 유소년 시절을 지내며 집짓기 놀이에 빠졌다.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어린 손자에게 나무로 된 집짓기 장난감 세트를 선물했는데 손자는 이걸로 꽤 멋진 집을 짓곤 했다. 이걸 보고 할아버지는 놀라서 "썩 훌륭하구나!"를 연발했다. 장난감 집짓기 놀이는 그가 왕이 된 후에 거대한 궁전 짓기로 이어져 여기에 몰두하게 된다. 

  루트비히 2세는 먼 친척인 바이에른 공작의 딸 조피 샤를로테와 약혼했으나, 청년 왕은 결혼할 뜻이 없었다. 둘은 결국 파혼하기에 이른다. 왕은 게이였던 것이다. 대개 왕이나 부자들은 여자와 돈에 빠져 파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왕은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세 가지에 빠져 평생 헤어나지 못했다.

  루트비히 2세는 첫째, 궁전 짓기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다. 두 번째,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70세)를 병적으로 사랑해서 국민들로부터 심한 불만을 샀다. 세 번째, 그는 여자가 아닌 남자를 너무 좋아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돈이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들어가서 나라와 자신을 망하게 했지만, 세 번째 남자를 사랑하는 데는 돈이 그다지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것으로 보면 그에게 그나마 바람직한 취미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밖에 없었던 것 같다.

  루트비히 2세는 즉위하자마자 국민들의 열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첫 번째로 이런 명령을 내렸다.

  "바그너를 찾아서 당장 여기로 데려와라!"

  당시 바그너는 태산 같은 빚을 지고 유럽을 정처 없이 유랑하고 있었다. 루트비히 2세는 그런 그를 맞아 그 많은 빚을 다 갚아 주고, 뮌헨에 호화로운 집까지 마련해서 편안하게 작곡 활동을 하도록 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엔 바그너의 고향인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에 당시 유럽 최대의 바그너 오페라 전용공연장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 왕은 15살에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고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이때는 루트비히 2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절망으로 바뀐 후였다. 바그너에 대한 과도한 경비지출이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했기 때문이다. 국민들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국정은 돌아보지도 않고 바그너에 깊이 빠진 왕에게 불만과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왕은 안타깝지만 바그너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은 바그너를 떠나보낸 후, 실의에 젖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루트비히와 바그너는 각별한 사이였다.바그너 입장에서 보면 왕은 자기를 빚 구렁에서 구해 준 구세주였다. 왕은 바그너를 왕궁에서 가까운 거리에 두고 하루에 서너 차례씩 황금마차를 보내 불러들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호엔슈방가우 성에도 초대해서 옆방에서 묶게 했다. 이때 바그너는 왕의 침실에 이런 쪽지를 남기기도 했다.

  "저는 천사 같은 당신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둘이 깊은 관계가 아니었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왕이 즉위하던 때 바이에른을 둘러싼 나라들의 정치적 상황도 아주 안 좋았다. 당신 게르만족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아직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을 때다.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큰 나라는 베를린을 수도로 한 프로이센이었고, 다음이 빈의 오스트리아였고, 세 번째가 뮌헨의 바이에른이었다. 루트비히가 즉위한 지 2년 후인 1866년,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려고 먼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비스마르크는 먼저 눈엣가시 같던 오스트리아를 통일제국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이때 혼미한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는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참전했다. 이 싸움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는 바람에 바이에른은 사람도 잃고 돈도 잃어 낭패를 당한다.

  결국 1871년 1월 8일,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주도로 독일제국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에서 탄생했다. 비스마르크는 루트비히가 황제 대관식에 와서 박수쳐 주기를 바랐지만, 왕은 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추천서만 보내고 불참한다. 속이 상했던 것이다. 바이에른은 독일제국 안에서 프로이센 다음으로 강한 나라였지만 이제 독일의 한 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까 국민과 대신들로부터 비난과 원망이 쏟아졌다. 골치가 아파진 왕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산속으로 숨어버린다. 1869년, 그는 어려서 자란 호엔슈방가우 성에 들어가 살면서 그 건너편 산속에 '새로운 백조의 성' 즉 노이슈반슈타인(Neuschweinstein) 성을 짓기 시작한다.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왕은 세상과 관계를 끊고, 바그너를 다시 불러들여 성을 짓는 계획에 참여시킨다. 궁전 안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연하고 감상하기 위한 커다란 홀 '가수의 방'도 만들도록 했다.

  이제 국가재정으로 건설비를 마련할 수도 없어 국가예산이 아닌 왕실의 예산을 몽땅 끌어다 썼다. 그래도 모자라서 왕족들에게서 막대한 빚을 냈다. 그래도 감당이 안 됐다. 할 수 없이 유럽의 여러 왕가에 머리를 숙이며 돈 좀 꾸어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끌어다 쓴 돈이 지금 돈으로 7,000억 원이 넘었다. 바이에른의 대신들 중에는 왕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왕이 나라가 망해 가는 데도 아랑곳없이 산속에 틀어박혀 성 짓는 대만 몰두하는 것을 보고 간언을 지나 분통을 터뜨렸다.

  건축가 크리스티안 얀크는 본래 무대감독이었다. 얀크는 왕과 바그너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성은 지금 보면 몽상가의 작품이 분명하다. 당시 대포가 발달해 있어서 망루가 필요 없어졌는데도, 왕은 단지 멋지게 보이기 위해 망루를 높이 세우도록 했다. 왕은 절해고도와 같은 산중에서, 1886년 죽을 때까지 여생을 이 일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는 죽어서야 궁전 만들기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궁전 건설은 미완성인 채로 끝나서 지금도 일부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공개되고 있다.

  왕이 만든 궁전은 과연 명작이었다. 뒷산의 '마리엔 다리'에서 보면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웅장하고 멋진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중세의 성채 모습이지만 로마네스크, 비잔틴, 고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자랑하고 있다. 내부도 놀랄 만하다. 내부엔 중앙난방, 수세식 화장실, 그리고 전화까지 마련돼 있다.

  왕은 17년간 공사를 하면서 막대한 돈과 정성을 쏟아부었는데도 이 성에 머문 것은 고작 3개월여였다. 그래도 자기 작품을 너무 사랑해서였을까, "내가 죽으면 이 성을 폭파해 버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한 사람이 또 있다. 뮌헨을 중심지로 삼고 갖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의 수괴 히틀러도 이 성을 미치도록 사랑한 나머지, 자기가 죽으면 이 성을 폭파해 버리라고 했으나, 그의 말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히틀러는 화가가 되려다 독재자가 된 사람이다.

  루트비히는 이 성 하나에만 미친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트리아노 궁전을 본뜬 린더호프(Linderhof) 성과 역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한 노이에스 헤렌킴제(Herrenchiemsee) 성을 거의 동시에 짓기 시작했다. 이런 미치광이 짓을 보다 못한 대신들이 음모를 꾸몄다. 

  운명의 시간이 왔다. 1886년 6월 8일, 루트비히 2세는 41세의 나이에 궁중 의료진에 의해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왕위에서 강제로 폐위됐다. 정신병으로 진단한 주치의 굿덴 박사는 왕을 만나 보지도 않고 서류로만 그런 진단을 내렸다. 더욱 놀라운 건, 왕과 굿덴 박사가 그 5일 후인 6월 13일, 폐위된 왕이 머물던 뮌헨의 베르크 성 근처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서 익사체로 함께 발견된 것이다. 그 호수는 물의 깊이가 무릎밖에 차지 않았다. 더 이상한 것은 장신의 루트비히 2세는 생전에 수영을 썩 잘했다는 것이다. 왕이 미친 사람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버리고 미치광이 짓을 한 왕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왕으로 해야 할 일을 잊고 혼미했던 왕은 결국 나라를 잃고 말았다.

  독일의 미치광이 왕이 지은 이 성을 지극히 사랑한 사람이 또 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다. 그도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고생 끝에 애니메이션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는 디즈니랜드를 만들면서 상징물로 아름다운 신데렐라 성을 지었다. 그 모델이 된 것이 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월트 디즈니도 독일의 아름다운 성에 매혹됐던 것이다.

  미치광이 왕은 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또 결과적으로, 미치광이의 작품은 싱싱하게 살아서 바이에른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즐겁게 하고 셀 수 없을 만큼 돈을 몰아다 주고 있다. 이 성이 만들어 내는 돈은, 루트비히가 탕진한 돈의 몇 백 배, 몇 천 배의 거액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여기서 영감을 받아 만든 세계 곳곳의 신데렐라 성이 만들어 내는 돈까지 합치면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가치는 숫자로 따지기 힘들 것이다.

  또 역설적으로, 미치광이 왕은 바이에른 왕국을 잃고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1세 밑으로 들어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망한 나라의 왕 루트비히 2세의 지명도는 오히려 제국의 황제 빌헬름 1세보다도 한참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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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 2019-봄호 <사진과 생각 ②>에서

  *  블로그주 : 사진은 책에서 감상 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