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계간 파란 2019년 봄호- 번역(발췌)

검지 정숙자 2019. 5. 9. 02:18

 

 

계간 파란 2019 봄         번역

 

 

   issue  번역(발췌)

 

 

 

  조재룡(알랭 바디우의『사랑 예찬』등을 옮김)

   - 번역이라는 화두/- 비교문학의 시작, 번역이라는 난제(발췌)

  김현은 누구보다도 성실한 연구자였다. 프랑스의 문학 이론 중 국내에 소개된 새로운 이론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한국 시를 읽고 신인을 발굴하고 비평했던 평론가였으며, 집요하게 한국 문학사와 문학 전반의 문제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프랑스 문학과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고 도입했던 장본인이었다. 16권으로 구성된 김현 문학 전집의 목차만을 살펴보아도 이와 같은 흔적을 목격할 수 있다. 바슐라르의 상상력 비평, 의식 비평(critique consciente)과 현장 비평의 산지라고 할 수 있는 제네바 학파 (스타로뱅스키 JeanStarobinsky), 조르주 풀레(Georges Poulet), 장피에르 리샤르(Jean-Pierre Richard), 장 루세(Jean Rousset)를 소개하였고, 바르트를 비롯한 구조주의 시학, 골드만을 비롯한 문학사회학,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비평 등, 어느 것 하나 김현의 손을 거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푸코에 대한 저작 『시칠리아의 암소』에서는 하버마스와 푸코의 현대성 논쟁에 대한 고찰을 비롯하여 앙리 메쇼닉에 대한 소개까지 망라한다. 그는 또한 『수사학 이론』『장르 연구』등을 편역하는 등, 문학 연구에 필요한 것이라면, 어느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불굴의 학자였다. 오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한국문학사』를 집필할 수 있었고, 『프랑스 근대 비평사』『프랑스 현대 비평사』등을 선보일 수 있었다. 김현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린 적은 있었지만, 김현과 프랑스 문학에 관한 것, 프랑스 문학 및 이론의 번역과 수용 전반에 관한 연구는 황현산의 「르네의 바다」(1992)를 제외하면 목격되지 않다시피 한다. (p. 64-66)

 

  안정효(G. 마르께스의『백 년 동안의 고독』등을 옮김)

   - 번역의 전설과 진실(발췌)

  일단 원칙을 세우면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필자는 우리말을 오염시켜 '번역체'를 만들어 내는 병균이나 마찬가지인 외래어는 아예 싹부터 제거하려는 마음으로 '호텔'이나 '텔레비전'처럼 극소수 불가항력의 외래어만 사용하여, 예를 들어 'elevator'를 번역할 때면 '엘리베이터'라는 한글 영어 대신 악착같이 '승강기'라고 언제나 확실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런 철저한 국산화 작업이 '안정효 번역문체'에서는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간에 실제로 번역 현장에서 보면 사실은 문장의 재구성이나 긍정문을 이중부정으로 개조하는 묘기 따위의 인상파 번역이 필요한 부분은 전체 작품의 5퍼센트조차 미치지 못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세공업처럼 대단히 정밀한 작업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아무리 둘러대는 의역이라고 해도 원문의 단어는 단 하나라도 함부로 누락시키거나 품사를 바꿔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하는 경우에도 본디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간접적이건 직접적이건 원문에 나오는 단어는 하나도 빼먹지 말고 번역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다 보면 어쩔 수가 없이 딱딱한 번역체가 된다는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번역문이 매끄럽고 유연하지 못한 이유는 십중팔구 우리말 어휘력이 빈약하고 문장 구사력이 서툴러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번역에서의 가장 치명적인 전설은 '영어를 잘해야 번역을 잘한다'는 통념이다. 사람들이 소홀히 넘기는 가장 심각한 착각은 '나는 영어를 잘하니까 번역할 자격이 넉넉하다'는 그릇된 인식이다. 그렇다면 영어를 아주 잘하는 미국이나 영국의 '초딩'들은 우리말을 전혀 몰라도 번역을 잘한다는 뜻인가? 번역에서는 외국어 실력은 기본적인 필수 조건일 따름이고, 실력의 승부는 우리말을 구사하는 능력이 결정한다. (p. 111-112 / p.115)

 

  이재룡(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등을 옮김)

   - 번역자의 투정(발췌)

  요새는 번역과 관련된 순수 이론서뿐 아니라 체험에 기반한 안내서도 적지 않다. 내가 저지른 오독과 오역도 무수했지만 그런 류의 글이 내게 실제로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런 데에 한눈파느니 나의 글을 한 번 더 읽고 다듬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오역의 지뢰는 곳곳에 깔려 있어서 지뢰밭을 건너는 법은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 읽으면 오역은 아닐지라도 항상 미흡한 구석이 많아서 나는 완벽한 번역은 오직 전설에 불과하며 오역은 번역가의 운명이라고 치부하는 편이다. 완벽한 번역의 전설은 성경과 관련된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기적의 경지란 말과 다름없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발간된 '70인 역본' 성경이 그 기적의 사례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계획되었는데 유대인 12지파에서 각기 6명의 장로가 번역자로 선발되었다. 72명의 번역자는 파로스 궁전으로 들어가 각각 72개의 방에 틀어박혀 72일 간 번역을 한 뒤 나중에 번역본을 비교했더니 똑같았다고 한다. 그리스어권 인구가 줄고 로마 시대가 되자 이번에는 라틴어 성경이 필요했다. 여러 번역자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 히에로니무스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그는 그리스어 성경뿐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을 기반으로 번역에 착수해서 꼬박 18년을 번역에만 몰두했다. 그러니까 중역본은 아닌 셈이다. '70인 역본'이 전설이라면 히에로니무스, 영어나 불어에서 제롬이라 불리는 성인의 번역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번역본을 '불가트' 즉 정역본이라 부른다. 그 뜻이 확장되어 지금은 성경과 무관하게 어느 문학작품의 정본을 '불가트'라고 부른다. 구약 불가트가 확정되는 데에 800년이 걸렸고 그것을 모아 신구약을 합친 책 하나로 번역하는 데에 18년이 걸렸다. 앞서 번역은 시간의 문제라고 한 이유가 이런 역사적 사실로 조금 설명될 수 있다. 그 와중에 글자 하나 바꾸려고 수십 년이 걸렸고 자칫 이단으로 몰려 죽은 이가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그것의 해석을 두고 벌어진 싸움에서 죽은 이의 숫자는 이보다 수천 배가 많을 것이다. 경전의 오역과 오독은 죽음으로 이어졌다. 인류 재앙을 번역자 탓으로 돌린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서도 찾을 수 있다. (p. 119-121) 

 

  김재혁(R.M. 릴케의『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등을 옮김)

  - 독일 시 번역의 비밀(발췌)

  나는 지금까지 60여 권의 독일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옮기고, 또 우리 시집을 독일어로 옯겼다. 양방향으로 번역을 해 보는 것은 번역자로서 번역에 대한 사유를 갖추는 데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다만 언어의 특성상 도착어로서의 단단함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므로 독일어에서 한국어로 오는 번역이 더 섬세한 문학성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 문학 연구자로서 지금까지 많은 번역을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해당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가운데 그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학 연구 방법론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번역 과정에서 전제되는 사전 조사, 텍스트 탐구, 불확정성의 확정, 언어적 · 내용적 결단 등이 텍스트 이해를 직접적으로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이다. 우리가 보통 오역을 이야기할 때 원문의 낱말에 치중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소소한 것들보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렸느냐이다. 번역 비평을 하는 사람은 따라서 해당 시인이나 작가에 대해 심화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 「Winterreise」를 왜 '겨울 여행'이 아닌 '겨울 나그네'라고 번역했느냐 하면서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가끔 보지만 이는 낱말에 집착한 데서 온 소산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뮐러의 이 작품은 물방앗간에서 애인을 잃고 쫓겨난 물방앗간 직공의 갈 속이 없는 방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물방앗간 직공은 당대의 민중의 아픔의 대명사이다. 그는 사랑했던 추억이 서린 보리수를 지나 무덤에도 들지 못하는 영원히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스버 같은 존재이다. '여행'이라는 표현보다는 주인공의 처지에 맞추어 '나그네'의 개념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낱말에 얽매이기보다 뮐러는 뮐러답게, 일케는 릴케답게, 카프카는 카프카답게, 헤세는 헤세답게 해당 작품의 특성에 맞추어 잘 번역되었는가가 먼저 새겨야 할 번역 평가의 잣대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 한국어로 아름답게 잘 표현되었다고 정답은 아닌 것이다. 릴케나 첼란이 서정주나 김춘수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어느 외국의 시나 소설을 읽는 것은 그곳만의, 그 시인만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p. 132-133)

  번역은 절대 반역이 아니다. 성경 번역의 전통에서 비롯하는 원문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과 번역에 대한 종 취급은 문화를 살찌우지 못한다. 독일의 루커를 비롯한 영국, 프랑스, 핀란드 등 각지의 성결 번역자들이 없었으면 우리는 교회에 나아가서 성직자들이 하는 말과 교회에 그려진 성화를 보며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 말에 백 퍼센트 수긍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외국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배반이 아니라 원문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면서 원문의 확장을 돕는 일이다. 번역은 그 시대마다의 풍속화를 기록하는 것과 같다. 언어는 끝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번역 역시 시대마다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시는 응축된 언어로 음악성과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번역가에게 선택과 결단의 문제를 던진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 난해한 문장 앞에서,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그 시인만의 시어 앞에서 번역가는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카프카의 『성』의 주인공 K처럼 끝없이 서성여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양심적으로 서성이다 보면 어느 날 불현듯 성의 내실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번역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연 당사자가 된다. (p. 154-155)

 

  박종우(『반곡 정경달 시문집』등을 옮김)

   - 근대 초기 문학사와 번역의 문제/- 김억과 김소월의 한시 번역(발췌)

  1924년 번역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놓고 김억과 양주동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김억은 『금성』창간호에 실린 양주동의 「근대불란서시초」의 오역을 일일이 지적하며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양주동은 『금성』3호에서 즉각 반론을 제기하며 김억의 주장을 공박하였다. 논쟁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김억은 '창작적 의역'을 주장하고 양주동은 '충실한 직역'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 공방도 결국 각자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차이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근대 문학사에서 최초의 번역 논쟁으로 평가되는 이 일은 번역의 위상을 단순히 내용을 옮겨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예술성을 가진 문학작품으로서 제고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사실 전통적인 번역관으로 바라보자면 김억보다는 양주동의 주장이 보다 일반적인 통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번역의 이상은 원문의 언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원문의 내용과 형식을 손실 없이 옮기는 데에 있다. 따라서 '창작적 의역'을 중시하는 김억의 입장은 번역의 기본을 모르는 자세이므로, 직역과 의역 중 어느 쪽이 외국시를 소개하는 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억은 '원문보다 뛰어난 시'를 창작하는 것을 번역의 최종 목표로 삼았다. 번역이 뛰어난 시로 거듭난다고 하는 그의 '창작적 의역'의 개념은 전통적인 번역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p. 158-159)

  번안의 사전적인 의미는 외국 문학작품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인물 · 장소 · 풍속 · 인정人情 등을 자국自國의 것으로 바꾸어 개작하는 일을 뜻한다. (……) 김소월의 한시 번역은 양적으로 매우 적었지만, 초기 근대 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그가 남긴 한시 번역은 전통문학과의 단절이라는 전망 부재의 시기에 새로운 근대 시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나가가 대안을 찾아 실천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 시인의 소중한 탐색의 자취이기 때문이다.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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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2019-봄호 <issue   번역>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