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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로서의 문학/ 오민석

검지 정숙자 2019. 3. 28. 02:09

 

 

    포이에시스로서의 문학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1.

기예技藝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닦은 재주"를 의미한다. 예술을 기예 혹은 기술이라 칭하는 것은 그것이 재주만이 아니라 '갈고닦기'를 통해서만 일정한 성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예술을 뜻하는 'art'라는 단어 역시 '기술'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문학 이외에 다른 예술 장르들, 가령 음악이나 회화, 무용 등을 논할 때 예술이 기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매우 힘들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 훌륭한 음악, 회화, 무용 작품을 결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발레리나 강수진의 상처투성이 발 사진이 공개되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는데, 그 발은 무수한 연습만이 예술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 준 '숭고한' 증거였다.

  그리스어로 시의 어원은 '포이에시스(poiesis)'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라는 말은 시뿐만 아니라 비극 등 문학 일반을 지칭하므로, 포이에시스는 문학 일반 혹은 문학 언어 일반을 지칭하는 어원으로 간주해도 된다. '포이에시스'는 '만들기(to mak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학이란 원래부터 인위적인 기술을 동원하여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학 역시 다른 예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기술' 혹은 '기예'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다른 예술 장르처럼 혹독한 연습, '갈고닦기'가 필요한 장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것은 문학의 질료가 물감이나 악기, 몸의 동작 같은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매일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언어는 예술의 다른 질료들처럼 '특이'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사용해 무엇을 할 때, 특별한(연마된)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미처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적 글쓰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와 달리 질료 자체에 대한 부담감,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어는 공기처럼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학적 글쓰기가 기술을 갈고닦는 단계를 생략하거나, 그것에 대한 자의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표현으로 넘어가 버린다. 다른 장르에 비해 문학판에 '아마추어' 혹은 '딜레탕트'들이 훨씬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만들기'는 생각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다른 예술의 질료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정신'의 총체를 훨씬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리나 색보다 언어로 정신의 궁핍을 숨기기는 훨씬 힘들다. 텍스트화된 정신은 정현종의 시에 나오는 대목처럼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이 쉽게 노출된다. 그리하여 문학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지성이어야 하는, 예술의 지엄한 명제를 이루기가 더욱 어려운 장르이다. 만만하게 보이는 질료가 사유의 얄팍함을 즉각적으로 드러낼 때, 아마추어리즘이나 딜레탕티즘은 설 자리가 없다.

 

  Ⅱ.

  훈련되지 않은 문학의 첫 번째 특징은 매체로서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문학을 언어-기술로 생각하지 않을 때, 언어는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편리한 수단 정도로 인식된다. 언어에 대한 이런 안이한 태도는 대체로 언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언어는 투명한 매체가 아니다. 언어를 경유하는 모든 대상들은 언어에 의해 왜곡되거나 굴절된다. 언어는 평면거울이 아니다. 이글턴(T. Eagleton)의 말을 빌면 "찌그러진 거울" 혹은 "깨진 거울"이다. 구조주의 이후 수많은 이론가들이 언어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 혹은 불완전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해 왔다. 소쉬르(F. de Saussure)의 지적대로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가 기호를 불안한 매체로 만든다. 기호는 사물(세계)을 지시하지 않으며 언어체계 내부에서 기호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에 의해 의미를 발생한다. 하나의 기표는 여러 개의 기의를 동시에 가지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언어로 세계를 복제해 낼 수 없다. 모더니즘 이후의 현대문학은 언어의 이와 같은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자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현대문학이 처한 아포리아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생산, 제작, 만들기이다. (재현 불가능한) 매체로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불충不充한 질료로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문학의 포이에시스이다. 문학은 다른 세계를 생산함으로써 세계를 비추고 세계와 겨룬다.

  '갈고닦지' 않은 문학의 두 번째 특징은 기술력의 현저한 저하이다. 문학의 기술은 (이제는 고루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낯설게 하기'를 향해 있다. 낯설게 하기야말로 모든 예술의 본질이다. 새롭지 않은 언어의 조립물들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문학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의 가장 큰 적은 클리셰(cliche)이다. 문학이 훈련과 연마를 필요로 하는 것은 '뻔한 표현', 즉 은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소통한다. 감성은 지구력이 없다. 쉽게 지치는 감성를 계속 깨울 수 있는 무기는 '새로움'밖에 없다. 그리하여 문학은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이 없는 자리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찾는 언어이다. "모든 형식은 고갈되었다. 더 이상의 새로운 형식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고백은 사실 모든 시대, 모든 예술가들의 고백이다. 문학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새로움을 계속 만들어 내야 하는 운명에 늘 처해 있으며, 그 운명에 철저하게 순종한 문학만이 '문학사'에 살아남았다.

  문학적 글쓰기의 어려움은, 숨 쉬는 것처럼 친숙해 의식조차 힘든 언어로 바로 그 언어를 의식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언어가 부각되지 않을 때 문학은 없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문학은 기술이고 표현이다. 언어는 너무나도 솔직해서 빈약한 사유를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그러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은 정신이 아니며, 서투른 언어는 그 자체 서툰 생각이고 서툰 감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주문은 이런 점에서 유효하다. 그러나 문학은 말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언어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까. 문학은 바로 이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있는 언어이다. 포이에시스가 만들고 제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전사戰士들에게 김수영은 말하였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敵들과 함께/ 敵들의 敵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아픈 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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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2019-봄<문예바다 나침판> 전문

  * 오민석/ 1990년 『한길문학』신인상에 시,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당선,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대중문화 연구서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집 『아침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