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겨울
정숙자
겨울은 설령(雪嶺)의 계절이다. 산맥에 쌓인 눈은 어느 바람에도 자깝스럽지 않다. 우리의 마음을 산란으로 이끌지 않고 생활에 불편을 주지도 않는다. 산마루에 내린 눈은 산맥 이상의 위의를 지닌다. 결코 호락호락 밟히지 않으며 쉽사리 녹거나 휩쓸리지 않는다. 항하사에 항하사를 곱한 것보다도 많은 눈송이들을 단 한점도 흘리지 않고 텅 빈 하늘가에 수묵담채화로 고스란히 담아낸다. 푸른 골짜기에 서린 비백은 포부를 간직한 침묵, 봄여름가을 삭이는 묵묵, 그리고 지금 막 들이닥친 만인의 시간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후원하는 과묵이다. 멀고도 가까운 도성 밖 산등성이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그 든든한 스카이라인은 우리 모두의 심적 고향이며 무소유를 권유하는 허공에의 밑금이기 때문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며 헤치며
보름달이 하늘에 떠
슬퍼 보이는 빛을 붓는다.
쓸쓸한 겨울 밤길을
트로이카가 화살같이 달려간다.
단조로운 말방울이
서글픈 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운 울림이 담긴
울적한 마차꾼의 노래 소리는
사납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또 마음을 상하게 한다.
불빛도 없다.
검은 오막집도 없다.
가도 가도 수풀과 눈뿐…
흙과 백으로 칠한 이정표가
때로 길섶에 보일 따름.
쓸쓸하고 슬픈 길이다. 니나여.
내일은 네 곁에 돌아가
난로 앞에서 모든 것 잊고 잊고
가만히 너를 바라보고 있으리라.
시계 바늘이 똑딱똑딱
정확히 때를 쫓고 있는 아래서
귀찮은 사람들을 피해 갖고
밤새껏 둘이서 이야기하며 밤을 새우자.
아아 니나여 서글픈 나그네 길이다.
마차꾼은 벌써 잠이 들고 말았다.
달빛이 안개처럼 짙어지고
단조로운 말방울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다.
-겨울 길-
이 시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의 전 생애가 응축된 작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편 중 하나이지만 “가도 가도 수풀과 눈뿐”이라는 한 구절 속에 고독한 삶을 가감 없이 아울렀다. 대를 이어 귀족이었던 그는 황제로부터 일일이 작품을 검토 받아야 했으며, ―그에 항거했다. 사교계 최고 미인이었던 아내의 사치와 정치적 압력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 접근하는 근위 사관 단떼스에게 결투를 신청함으로써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군인과 시인의 결투라는 말 자체가 비대칭구도였음에도 단떼스는 먼저 총을 쏘았고,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푸쉬킨은 이틀 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단떼스는 허위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황제의 개입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미해결인 채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황제는 결투 사실을 미리 알았음에도 아무런 조처 없이 수수방관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의 고전적 사실주의와 러시아 문장의 창시자였던 그의 유해에 작별을 고하고자 운집한 시민이 무려 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가 누구였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곡창으로 알려진 우리 고향 김제엔 농수를 가두기 위한 방죽이 많다. 김제벌 어디든 마을이 형성된 곳이면 어김없이 수심 깊은 방죽이 딸렸다. 가뭄엔 튼튼한 수문을 열어 너른 벌판으로 물줄기를 쿨쿨쿨 흘려보냈다.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 한 톨 한 톨은 그렇게 천-지-인이 합심하여 이루어낸 보석들이다. 특히나 크고 둥그런 우리 동네 방죽 물에는 모악산, 사청산, 참산이 겹겹이 비쳐들었다. 그리고 방죽 가장자리엔 남향으로 앉은 오두막집 한 채가 잘 어울렸다. 그 조그만 집은 내 출생 이전에 구들장을 놓았다한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오두막집 없는 방죽이란 상상으로도 불가능했다. 덜떨어진 내 어린 날의 눈까풀은 내내 그 방죽이 우주 공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일 거라고 감탄하였다. 아침 해도 거기서 뜨고 만발한 저녁노을도 그리 빠졌다. 겨울이면 백조들이 그 곁에 깃들었으며 강남에서 날아든 제비부리도 그 수면을 차고 올랐다. 내 어설픈 꿈 또한 거기서 생겨난 껍데기였다. 그 온화하고 수려한 명경지수를 아끼고 사랑한 이가 나뿐만이 아니었으니! 희언 아저씨가 바로 그였다.
가도 가도 봄이며 꽃길인 삶이 어디 있을까. 가도 가도 봄이며 꽃길인 삶이 있다면 그 봄과 꽃길이 기쁨임을 어찌 알아차리겠는가. 의식구조를 갖추지 않은 광물과 물방울 하나까지도 온전히 몸 벗는 순간까지는 뒤채이고 마모되는 고난의 연속일 것이다. “가도 가도 수풀과 눈뿐”인 현실에서 드물게 만나는 봄과 꽃길이기에 우리는 그 순간을 그리워하고 또 기다리며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은 아닐까. 여름엔 구름을 끼고, 가을엔 달빛을 딛고, 한겨울 아침나절엔 숫눈 에두른 산허리를 바라보면서.
그 무렵 시골에서는 입원이 쉽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아니 시대가 궁핍했으니 말이다. 작은오빠는 주말이면 집에 왔다가 이튿날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눈 내리는 어느 일요일, 오두막집을 방문한 작은오빠는 희언 아저씨의 배에 물이 차오른다고 근심을 부풀렸다. 그리고는 매주 복수를 뽑아 드리고 넉넉지 못한 월급을 덜어 주사약과 주사기, 증류수, 소독약, 핀셋, 먹는 약까지 사 날랐다. 또한 나에게 ‘하루 한 번’ 주사를 놔 드리라고 베개를 엉덩이 삼아 주사 놓는 방법도 가르쳤다. 도구 일체를 삶고 건지는 법이며, 증류수에 몇 cc의 약을 타야 하는지, 소독약을 어떻게 문지르고 간수해야 하는지, 주사바늘을 어느 각도로 꽂고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등등.
세계가 아무리 초고속으로 변한다 해도 기억 속의 고향은 바뀌지 않는다. 아직 말라깽이인 나 자신과 부모형제, 동네 어른과 친구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생활한다. 희언 아저씨는 키가 작고 마른 편이었다. 정월 대보름이나 까치설날이면 마을 남자들로 구성된 걸립패가 가가호호 고샅길을 돌았는데, 희언 아저씨는 꽹과리를 치는 상쇠였다. 곡식을 내는 집이 거개였지만 어떤 집에선 돈을 내기도 했고, 갓 장만한 안주와 막걸리를 곁들여 대접하는 집도 있었다. 마을 어귀에 걸립패의 농악 소리가 뜨면 희뜩번뜩 웃음 띤 아이들이 줄레줄레 따라다녔다. 물론 나도 그 중 한 코쭝배기였다. 언젠가는 희언 아저씨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엉덩이까지 흔들어 보는 이의 배꼽이 전복되기도 했다. 희언 아저씨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몸집이 자그마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예의 그 방죽가 오두막집에 살았다. 콩 무더기에서 멀리 굴러나간 한 알의 콩에 해당하는 외딴집이었으므로 논둑밭둑 언덕을 넘어야만 비로소 방 한 칸 부엌 한 칸을 감싼 희언 아저씨네 반달지붕이 나타났다. 뒤로는 소나무 숲이, 앞으로는 맑은 방죽이, 그리고 방죽 아래로는 만경을 헤아리고도 남는 들판이 펼쳐져 있어 천혜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백미를 가리자면 단연 사계절의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방죽이었다.
그러니까 40년 전. 그야말로 한 치에 불과한 생각들이 활개를 내두르며 ‘겨울 길’을 베꼈던 내 나이는 열다섯. 그러므로… 좀더 성실한 원고를 마련키 위해 서가의 오래 된 책 말고도 관련 서적을 3권이나 더 구해 뒤적거렸다. 하지만 ‘겨울 길’은 어린 시절 이후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주지 않았다. ‘그 시 아무아무 책에 있는데’라고 일러주는 독자가 있다면 참 고맙겠다싶다. 이 시에 열광한 내 열다섯은 무엇이었을까. “가도 가도 수풀과 눈뿐”인 자기 궤도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었을까.
돌이켜보건대 희언 아저씨는 타고난 예인이었다. 생계를 잇는 데 일생을 허여했지만 낭창낭창한 허릿짓이며 어깨춤, 빈틈없이 여물었던 꽹과리 소리가 이제 와서야 뜨거움으로 짚인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붕어 송사리 새우 피라미 우렁이까지도 직접 잡아먹었으므로 방죽물이 희언 아저씨에게 푼돈이나마 보태주었을 리 만무다. 들녘이 푸르러지면 희언 아주머니는 품을 팔았고, 희언 아저씨가 띄우는 물별 위 조각배는 저녁 찬거리 정도를 해결해 주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 희언 아저씨가 병을 얻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자자했다. 내 작은오빠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진찰받을 수 있도록 도와 드렸다. 병명은 간디스토마라고 단박에 튀어나왔다. 다름 아닌 물고기가 근원이었다니! 원인과 결과는 어찌 그토록 맞붙어 사는 것일까. 물빛을 사랑하여 거기 오두막을 지었을 테고, 가난한 밥상이기에 빈번히 물고기를 건져 올렸을 테고, 평생토록 위로와 우정이 되어주었던 물고기들이 웬 변덕으로 끔찍한 흡충류들을?
우리는 자기 안에서 죽어나가는 자신을 무수히 전송하고 묻어야 하며 돌아서서 걸어야 한다. 도와줄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도래하는가. 한파를 견디는 힘은 한파로써만이 훈련되고 숙련되는 법. 설령(雪嶺)을 지키는 한 그루 한 그루 소나무마다 착근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겨울이 깊어질수록 봄은 가까워진다. 파고드는 추위이거든 힘껏 껴안고 골똘히 믿자. 산맥의 높이는 우연히 도드라진 땅의 높이가 아닌, 서릿발을 감내한 뿌리들의 높이이리라. 발 시린 밤길일수록 부드러움 놓치지 말자.
희언 아저씨네 집으로 가는 길이면 눈 쌓인 모악산이 좀더 멀리 보였다. 들에는 눈발이, 하늘에는 바람이, 추녀 끝엔 길쭉길쭉 뻗어 내린 고드름들이 겨울을 더욱 사납게 몰아붙였다. 오두막집 방문을 열면 아주머니와 어린 아들이 희망을 깁고 있었다. 낮고 좁고 어두운 천정에서도 “겨울 길”은 “정확히 때를 쫓”았다. 희언 아저씨는 하루하루 무서우리만치 야위어갔다. 그렇지만 나는 정성을 총동원했다. 양은솥 아궁이불로 주사기를 삶았고, 눈보라 “헤치며 헤치며” 언덕길을 넘었다. 희언 아저씨의 깡마른 주사 자리를 조심조심 문질러 드리고 나면 타박타박 갔던 길을 되밟아왔다. 그리고는 “그리운 울림이 담긴” 명시들을 감상 차원에서 이해하며 저절로 외워질 정도로 읽고, 읽고, 또 읽고 제일 좋은 공책을 골라 필사하는 데 골몰하였다.
춘설 분분한 방죽 길로 희언 아저씨의 상여가 상엿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고이 잠드소서!) “인생일장춘몽이요~세상공명꿈밖이라~어어행~어어행~내몸하나병이들면~백사만사허사로다~어어행~어어행~이생에서미진한일~후생에서누리소서~어어행~어어행~” 내 탯자리 김제 지방의 구슬픈 앞소리와 뒷소리가 텅 빈 논바닥으로 애절하게 퍼져나갔다. 날마다 오가던 언덕에 멈추어 서서 그 신작로를 바라보는 내 절망은 깡동치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열다섯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며 허무였다. 자신의 손끝에서 죽어나간 생명을 인정하고, 손 흔들고, 시공을 견디어야 했던 것이다. 갈봄여름 없이 스며드는 내면의 “겨울 길”을 나는 그때부터 더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며칠 전, 거짓말 같은 사실을 듣게 되었다. 희언 아저씨의 아드님이 지금도 거기 살고 있다는 탁언이었다. 뿐일까, 물고기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방죽 한가운데로 조각배를 타고 들어가 몇 마리 건져준다는 소식이었다. 절대로 많이 잡거나 내다 파는 일도 없다고 한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어쩌자고 이토록 슬프고 아름다운가! 선친의 길에 자신의 발자국을 얹으며 운명까지도 용서해버린 것일까. 그 아드님도 40이 훨씬 넘었으리라. 연꽃이 솟을 때쯤 틈내어 가봐야겠다. “가도 가도 수풀과 눈뿐”인 시구의 뜻 몰라도 좋았던 자신을 찾아, 시인의 길 알 리 없었던 철부지 적 하늘을 찾아, 희언 아저씨와 작은오빠, 눈 쌓인 모악산의 지지가 따뜻했던 시간을 찾아….
*<리토피아> 2006-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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