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여름
정숙자
여름은 구름의 계절이다. 초록구름, 뭉게구름, 소리구름이 어울려 천지가 화려하다. 산과 들, 텃밭 꽃밭에서도 초록초록초록잎은 생명의 색깔이며 가능성의 상징이다. 강물에 빠져서도 젖을 줄 모르는 산 너머 흰구름은 또 얼마나 눈부신 별유천지인가. 한두 점이 피기 시작하면 백장미요, 한두 섬이 쌓이면 들찔레이며 수국수국수국꽃이 군락을 이루면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얼비치는 궁궐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매미, 여치, 개구리, 뜸부기, 뻐꾸기, 종달새 등 온갖 종들이 쏟아내는 소리구름이 없었다면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지 않았을까? 공허롭지 않았을까? 개인의 권력이나 명예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이들 구름 곁에서 가난한 사람도 춥지 않은 한때를 누릴 수 있고, 조금만 기온이 떨어져도 날지 못하는 호랑나비 부처사촌나비도 신의 섭리를 열어 보인다. 아차! 그러나 여름날의
구름을 말함에 있어
먹구름을 빠뜨린다면 공주의 탄생을 축복하는 잔치에 한 사람의 마녀를 초대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실수이리라. 마녀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을 개체가 어디 있겠는가. 먹구름 속에 간직된 소나기와 무지개, 그리고 더 맑아진 은하수 은하를 사랑하기에 우리는 그가 지닌 천둥 번개와 폭풍의 눈까지도 겸허히 수용한다. 먹구름은 흰구름의 자매이며 벗이자 분신이다. 서양 철학사 첫머리에 살아 있는 탈레스는 생명의 기원을 물로 보았다. 거기 비춘다면 먹구름이야말로 지구 생명의 발원지이며 미래밭이 아닐까. 먹구름 송이송이에서 빗줄기가 쏟아지고, 무지개가 뜨고, 달과 별들이 한층 더 깨끗해진다. 비갠 날 아침의 태양과 이슬, 불어난 강물과 모여드는 물고기, 영롱해진 숲길과 들녘의 바람… 어느 것 하나 먹구름의 세포가 아닐 수 없다. 잠깐! 구름에 대한 시 한 편을 읽기로 하자.
1. 이방인(異邦人)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응? 아버지냐, 어머니냐, 또 누이냐, 아우냐?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아우도 없다.
―친구들은?
―당신이 지금 한 말은 나는 오늘날까지 그 뜻조차도 모른다.
―조국은?
―그게 무슨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나는 몰라.
―미인은?
―그것이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지만.
―돈은?
―당신이 하느님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한다.
―그래! 그럼 너는 대관절 무엇을 사랑하느냐, 괴상한 이방인아?
―나는 구름을 사랑한다……흘러가는 구름을……저기에……저기에……저 신기한 구름을!
―보들레르, 소산문시(小散文詩) 「빠리의 우울」중에서
프랑스의 빠리는 우리나라의 서울이다. 도시는 늘 화려함과 빈곤의 양극을 지닌다. 초호화 백화점과 특급호텔이 빛을 뿜는가 하면 구멍가게와 뒷골목, 어둠이 상주하는 쪽방촌이 공존한다. 가족, 친구, 조국, 연인, 돈, 하느님, ―이 모두로부터 추방된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를, 무엇을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을까. 설혹 빈곤을 앓더라도 가족이나 친구, 연인, 조국,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다면 아주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 연인, 조국,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한껏 부유를 누린다면 그 역시 아주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피력한 ‘이방인’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한 인간의 절규다. 그토록 우울한 자신에게 누구를 사랑하느냐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보들레르를, 어느 한 사람도 떠올릴 수 없었던 보들레르를, 허공으로 눈 돌리는 보들레르를
구름을 말함에 있어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사계절 중 여름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뭉게구름은 곤충들을 데리고 돌아와 더욱더 다정하다. 다리, 가슴, 날개, 더듬이 어느 것 하나 실하지 않은 그들을 겨우내 품어준 이는 바로 저 구름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을이 되어 점차 기온이 내려가면 뭉게구름은 또 추위에 약한 곤충들을 감싸 안고 어느 따뜻한 별을 향해 흐를 것이다. 천체물리학자들이 대기권의 원리를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생물학자와 정신의학자가 내 추측을 일거에 지워 버린다 해도 나는 내 상상의 궤도를 믿고 보호하고 사랑할 것이다. 여름날의 풍성한 햇살 끝에는 나비, 잠자리, 풀무치, 풍뎅이, 반딧불이, 소금쟁이들이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우리 곁을 빛낸다. 어린 시절 흙에서 자랐다는 것만큼 값진 행운이 어디에 또 있을까. 지상을 겪는 것이 하늘을 아는 일이며, 하늘과
구름을 말함에 있어
아침 햇살과 이슬을 결여할 수 없으리라. 내 고향은 곡창 김제이거니와, 김제벌 너른 들의 영롱한 이슬빛은 어느 지평에서도 으뜸일 것이다. 이른 아침 학교 길, 이슬을 달고 휘어진 풀잎에 발목이 젖는 건 예사였지만 우주의 모든 별들이 일시에 쏟아졌는가싶을 정도로 헤아리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밭두둑에, 벼논에, 풀밭에, 나뭇잎에, 거미줄에 매달린 그들 이슬은 태양이 우리에게 선사한 또 한 종류의 꽃이요 별이며 씨앗이다. 한순간을 딛고 가는 그들 이슬은 남다른 색깔이나 몸집 족적도 원치 않는다. 남달리 크지도, 무겁지도, 화미하지도 않은 그쯤에서 충분히 담박하고 수승하다. 불타는 한낮의 탈진을 막기 위하여 잎새 위에 온전히 몸 부어주는 그들 이슬은 흰구름 먹구름의 깊고, 맑고, 따뜻한 그리고 변함없고 조용한 사랑의 단위이다. 1960년대 초, 그러니까 내 나이 아홉 살 무렵의
구름을 말함에 있어
우산은 흔치않은 생필품이었다. 종이에 기름을 먹인 지우산이 태반이었고 헝겊우산은 매우 귀했다. 플라스틱 문화가 확산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비닐우산이 등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우산 대신 오동잎, 보자기, 회포대, 군용 비옷 등이 동원되었고, 소나기라도 쏟아질 때면 행인은 추녀 밑에서 빗발이 가늘어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한 우산 아래 여러 사람이 머리를 디밀고 걸어가는 광경은 너무나도 스스럼없는 현실이었다. 뿐일까, 생판 모르는 불한당일지라도 “같이 좀 쓸 수 없을까요?”하고 우산 속으로 뛰어들면 내쫓기가 쉽지 않았다. 그 틈에 낭만을 구가하려는 청춘들도 있었는데 그 또한 그 시대의 유머이며 미덕이었다. 아니! 이야기가 너무 앞으로 나와버렸다. 다시 내 아홉 살 때로 돌아가자. 그 여름에도 비가 내렸고 나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회포대’를 강요하시던 아버지의 표정과
구름을 말함에 있어
새언니의 양산은 잊을 수 없는 내 유년의 우담발화다. 그날 아침에도 먹구름은 비를 풀었고 나의 등교는 철칙이었다. 가뜩이나 허약한 나를 염려하신 아버지는 ‘회포대’를 둘러쓰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홉 살짜리한테도 눈과 자존심이 엄연하다. 불품없는 물건을 둘러쓰느니 차라리 비를 맞으리라 결심하였다. 끝내 ‘회포대’를 안 쓰겠다고 버티는 아홉 살짜리에게 아버지는 언성을 높였고 안구에까지 힘을 주셨다. 나는 자아와 외압 사이에서 가방을 든 채 빗물의 팔촌 격인 눈물을 떨어뜨릴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 갓 시집오신 새언니가 당신의 양산을 들고나와 내 손에 쥐어주시며 “울지 말고” 학교에 가라는 것이었다. 이후 그 양산은 나의 우산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어느 여름에도 <새언니와 양산>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내 나이 마흔 되던 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언니// 오늘은 백화점에 들러 제일로 좋은 양산 하나를 샀습니다. 30여 년 전 제가 망가뜨린 양산을 갚아 드리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언니가 시집올 때 갖고 오신 그 양산만큼 예쁜 것은 없었습니다. 피어오른 뭉게구름과 서양식의 작은 집, 하늘빛 시원했던 가장자리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요즘엔 왜 그런 문양이 나오지 않는 걸까요? 그토록 꾸밈없는 테마와 색조는 영 사라진 것일까요? 여백이라고는 없는 꽃무늬와 줄무늬, 또는 알 수 없는 무늬와 수(繡)양산 민양산들 뿐이었습니다. 지난 날 초가지붕 아래서의 그 양산은 얼마나 산뜻하고 화사했는지요. 꼬부라진 손잡이도 천사의 홀이 아닌가 싶게 정교했지요. 그렇게나 고운 걸 내어주신 사랑이 제게는 도돌이표행복이 되었습니다. 언니, 그때 그 양산에는 댈 수 없지만 오늘 마련한 이 빨강 양산에 오랜 고마움과 감사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언니! 언니! 작년에 어렵사리 진급한 정 서방이 엊그제 새 견장을 달았어요. 이제 더 이상 진급을 못하더라도 연금만은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안했던 앞날, …끼니 걱정 면하게 되었으므로, 사실은 그 첫 기념으로 이 양산을 샀습니다. 언니, 꼭 꼭 꼭 오래도록 건강하세요. 이 밤엔 이만 말씀을 접고 내일 아침, 유빈이 수경이 학교 보낸 다음 곧바로 뵈러 갈게요./1992.5.6. 셋째 시누이 올림.
다시 구름을 말함에 있어
이 같은 향갑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특별한 위안이며 축복이다. 과거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므로, 정정할 수 없으므로, 계획해 볼 수조차 없으므로 완전한 소유다. 과
거는 본인 마음에 들거나말거나 완강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하루하루를 애써 다듬는 것이리라. 흰구름 먹구름은 하늘에만 움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도 끊임없이 깃든다. 폭폭한 현실을 쉬고 싶을 때, 원대한 미래를 목표 세울 때,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의 여행을 꿈꿀 때 구름은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산과 들에 출렁이는 초록초록초록구름도, 하늘 멀리 피어오른 수국수국수국구름도, 젖은 땀 식혀주는 소리구름도 여름이면 돌아오는 우리의 오랜 친구다. 구름의 시인 보들레르를, 초원의 기쁨 곤충들을, 풀잎의 연인 이슬방울을, 스물둘의 <새언니와 양산>을 나는 다른 별에 가서도 행복스레 추회할 것이다.
* <리토피아> 2006-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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