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봄
정숙자
봄은 물빛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 소리가 싱그럽고 움직임이 발랄하고 정신이 성실하다. 겨우내 굳었던 물방울들은 제일 먼저 일어나 꽃을 깨우고, 싹을 틔우고, 동면에 들었던 뭇 생명들을 눈뜨게 한다. 물은 어디에도 담기며 어디서도 흐른다. 동식물의 근원을 소급하면 그 첫 자리에 수분이 있다. 아니 시간을 거스를 필요도 없이 나 자신의 몸 맺힘이 곧 핏방울의 결정 아니었던가. 겨울에 쏟아지면 함박눈, 여름에 몰리면 소나기, 봄가을에 떨어지면 많은 이들의 외로움에 불을 지르는 기름이니 거기서부터 인류는 번성했을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물을 아끼고 받들거니와 그 한 방울에서 한 폭에 이르기까지의 맑음을 사랑한다. 삶의 증거인 눈물도 물이요, 연인들의 합일점 또한 곱고 따뜻한 이슬의 나눔이니 어찌 한 국자의 물인들 함부로 후정크릴 수 있겠는가.
1
태양은 오늘도 산란기다
강물 가득 흔들리는 물별을 봐라
붕어로 송사리로 쏘가리로… 맑고 따뜻한 지느러미로… 바람으로 몸이 풀린다
2
한가람 은물결 위에 멍석 한 닢 떠내려가네
올록볼록 선친 기침소리 떠내려가네
은하계 엎질러져 떠내려가네
우리 어머니 밭 매고 돌아오실 때
얼굴에 흐르던 땀방울들도 저기 돌아와 반짝거리네
3
예술을 동경한 몇몇 물별은 여인에게 스며 태아로 크고 나비를 사랑한 몇몇 물별은 대지에 들어가 꽃을 꺼내고 새소리 그리운 몇몇 물별은 품 넓은 나뭇가지와 잎새들을 뿜어 올리고
4
나도 한 알 물별일 게다
어머니가 우물물 길어 마실 때 따라 들어간 빛살일 게다
절망에 먹히는 삶일지라도 어둠만은 아닐 것이다
뒤져라, 뒤져라, 뒤져라…
DNA가 태양이란다
네 몸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굴절을 모르는 광선이란다
5
강물 바라볼 때 아늑했음도
건네받은 물 한 그릇 두고두고 고마웠음도
<물별> 그 이름이 그토록이나 간절했음도
해돋이엔 저절로 눈이 뜨이고 이슬 내린 풀언덕 정다웠음도
물로써 마지막 발을 헹구고… 하늘로 햇살로… 다시 물방울로 되돌아감도
6
흘러야 물이다 떠내려가네
구름 걸린 산봉우리 떠내려가네
지구를 감은 많은 길들도 발자국 빛내며 떠내려가네
우리 모두는 태양이란다
태양이 낳은 태양을 닮은 태양의 물별이란다
―물별1)―
위 시는 필자의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 수록된 한 편이다. ‘물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산문시 한 편을 더 적을까 한다.
물결이 햇빛을 반사할 때 생기는 반짝거림을 한 마디로 표현할 낱말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다보면 문장의 리듬이 풀어져 버리고 말지요. 조어가 절실했습니다. 가령 "오늘 오후, 버스 타고 한강을 지나는데 물별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라고 하면 금방 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물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면, 몇 마디 말과 시간을 더 소비해야만 전달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별이라는 명사를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면 몇 음보의 해설 없이도 눈부신 수면을 즉시 연상할 수 있겠지요. "오늘은 물별이 서너 개밖에 없더라"라고만 하여도 물빛의 정도를 금세 떠올릴 수 있겠지요. 국어사전에 물별이라는 식물이 나와 있지만, 또 하나의 물별이 생긴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별이라는 이름씨가 '단추'라는 말 버금으로 자연스럽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물별은 분명 창공의 별을 닮았고 물위에 뜨는 빛이니 적합하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별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먼 하늘 별보다 덧없고 영원하며 슬프고 또 아름다운 진짜 별일지도 모릅니다.
―물별에 대한 주석2) ―
언어는 생명이다. 시간의 조류에 따라 명멸한다. 산, 바다, 하늘, 강 등등 수많은 고정불변의 어휘가 있는가 하면 낯선 용어들이 속속 생겨난다. 타인의 글을 잠시만 읽지 않아도 자신의 전문분야 용어조차 따라잡기 힘들 정도다. 인간의 역사는 언어의 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필자가 물별이라는 말을 처음 발표한 지면은 1988년에 발행된 첫 시집3)이었다. “빛이 닿아 반짝거리는 물결의 모양”이라고 주석도 달았다. 그리고 제2시집4), 제3시집5) 에서도 사용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봄이 오면 맨 먼저 물이 풀린다. 바람이 풀리고 구름이 풀리고 빗방울이 풀리고 흙이 풀린다. 꽃이 풀리고 씨앗들이 풀리고 잎이 풀리고 뿌리가 풀린다. 새소리가 풀리고 송사리가 풀리고 아지랑이가 풀린다. 빨강 노랑 분홍물 사이사이 온갖 색이 풀린다. 여인들의 옷차림이 풀리고 발걸음이 풀리고 꿈이 풀린다. 별박이세줄나비 왕자팔랑나비 눈많은그늘나비 춤사위가 풀린다. 도시로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들로… 뜻을 품은 젊은이들의 길이 풀린다. 어디 그뿐이랴. 봄이 오면 너와 나의 웅크렸던 시력이 풀리고 문빗장이 풀리고 감성이 풀린다. 그 모든 울림 어울림 풀림 속에는 알게 모르게 섞이는 물결이 있다. 물은 기저이며 갈래이며 집합이다. 달에는, 화성에는, 퀘이사(quasar)에는 물이 있는지/있었는지 지금 이 시간에도 천체물리학자들의 관찰이 이어진다. 우리에게 최초의 식량은 젖이었으며 최후의 음식 또한 한 수저의 물일 것이다. 물이 넉넉한 땅은 비옥하고 풍요롭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과연 얼마만큼 깊은 샘이 있는가.
친정집 마당가에는 달빛 쩌렁한 우물이 있었다. 물을 퍼 올릴 적마다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얼마나 청랑했는지! 그보다 더 맑고 동그란 소리를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당시 우물이 없는 집에선 공동우물이나 남의 대문을 드나들어야 했다. 아버지의 젊음은 집터를 잡은 뒤 제일 먼저 우물을 팠다고 한다. 나보다 여덟 살 많은 언니는, 나보다 여덟 섬 더 많은 이야기를 요즘도 산책길에 조곤조곤 더듬어낸다. 우물 바닥에는 많은 자갈을 깔아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들녘에 흩어진 돌멩이들을 주워 모았었다고…. 새 우물에는 아무도 몰래 물맛이 좋은 우물물을 퍼다 부어야 그 물줄기가 따라 들어온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첫새벽에 윗마을까지 밟아가 우물물을 길어 오셨었다고…. 근동에서도 알아주었던 우리 우물물은 그렇게 정성 가득한 부모님 마음에서 샘솟는 생명수였다고….
문우란 참 고맙고 든든한 말이다. 그냥 친구라는 의미와는 좀 다르다. 같은 세계를 추구하고 호흡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경쟁심을 가질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으로써의 선의에 한정된다. 성격과 생활환경이 다양하지만 여타의 세속적 경계를 뛰어넘는다. 문우는 정보를 공유하고 고독을 함께 나누며 새로운 심미안을 목적한다는 점에서 서로 돕는다. 군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독과 희망을 안다. 일단 먹물에 발을 들인 서생이라면 별종의 인간계열에 소속되었음을 자타가 인정해야 하리라. 한 명의 문우와 차 한 잔을 마실지라도 열 사람의 떠들썩모임에 지지 않는다. 문우는 의복에 구애받지 않으며, 밥값에 인색하지 않으며, 시간을 섞음에 있어 궁하지 않다. 천하가 알아주지 않아도 문우끼리 어울려 한바탕 웃고 나면 어느덧 현실과 이상이 충만해진다.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지만 문우라는 울타리가 있어 찬바람이 들지 않는다. 설령 어떤 문우에게 불행이 닥친다 해도 문우는 그 불행을 비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주위를 다독이며, 말보다 먼저 마음을 쓴다. 문학에는 정년이 없으므로 우정에도 끊임이 없다. 얼굴에 나이테가 늘면 늘수록 미운 데 고운 데를 서로서로 더 잘 에두르게 된다. 어느 날 한 문우가 세상을 떠난다면 남은 문우들은 그 별자리의 허전함을 메우기 힘들 것이다. 문인에게 만일 문우가 없다면 문학의 즐거움이 대폭 삭감되리라.
2004년 3월 20일의 내 다이어리에는 “노혜봉, 한틈새, 박소향, 이정임, 송진근 시인과 점심/차”라고 적혀 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의 시간을 가졌다. 까페 창가의 햇살도 화사했지만 ‘만났다’는 즐거움이 봄을 더 봄답게 했다. 개인근황에서부터 어설픈 정치 경제는 물론 배를 움켜쥐지 않고는 못 배길 우스개 콜렉션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물별’에 대한 논의가 진지했다. 내가 ‘물별’이라는 신조어에 대해 “어떤지?” 타진하자 이구동성으로 <적합> 판정을 내렸다. 특히 한틈새 시인은 “하루 빨리 물별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문예지에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 신중한 제안에 우리는 모두 찬성했다. 나는 곧「물별」을 지었고, 그해『현대시』7월호6) 에「물별에 대한 주석」과 함께 발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국립국어원(구 국립국어연구원)으로 자료를 제출하였다.
지구상의 모든 물은 한곳으로 흐른다. 아래로아래로 흘러 하늘로하늘로 날아오른다. 거기 찰나의 빛으로 살고 가는 섬광이 물별이다. 그 물의 한 자락 베어 먹는 우리들 역시 머지않아 물별로 돌아가리라. 넉넉잖은 살림 속에서도 일찍이 우물을 마련했던 아버지, 이웃들에게 스스럼없이 사용하게끔 배려했던 어머니도 이제는 다른 별의 물별이 되셨으리라. 해마다 칠석이면 아버지는 우물을 쳤다. 참으로 수월찮은 연례행사였다.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수동으로 물을 퍼내야 했고, 외줄에 의지해 열 길 어둠 속으로 내려가야 했다. 동네 청년들이 도왔지만 강하만은 반드시 아버지가 맡았다. 간단한 옷차림에 농립을 쓰고, 한 발씩 어렵사리 내려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풀려진 물때와 빠뜨린 물건 등이 양철통에 담겨져 올라왔다. 아버지와 청년들은 일사불란했다. 아버지가 밑에서 줄을 흔들면 청년들이 알아채고 재빨리 끌어올렸다. 조금만 늦어도 샘물이 아버지의 목을 넘어버릴 판국이었으니 즉시즉시 빈 양철통이 내려가고 또 올라오고… 드디어 양철통 물이 맑게 올라오면 청년들이 ‘됐다’고 소리쳤다. 그러면 아버지는 크로르칼키로 소독을 마친 다음 힘겹게 올라왔다. 한층 깊어진 우물 아래 솨아솨아 차오르는 물소리가 으스스했던 기억! 며칠 지나면 소독약 냄새도 없어지고 우물 속엔 황금빛 달이 꽂혔다.
여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자연이 있었다니! 그것도 물결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별이 말이다. 이런 발견은 노력이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고 우연의 산물이리라. 20년이 되어도 확산되지 않은 물별의 보급을 위해 부득이 필자의 시를 인용한 점, 독자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한다. 시 외에 국어를 보존하고 개발하는 일 또한 시인의 사명이자 임무라면 물별 하나 이 땅에 바치는 일도 결코 허사는 아닐 것이다.
엊그제 다시 국립국어원으로 전화를 했다. 새 국어사전을 편찬한다던 2007년이 밝았으므로. “타당성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많이 쓰여야 국어사전에 올립니다.” 유보적이었던 담당자가 바뀌어 3년 전보다 훨씬 더 단호했다. “노견이라고 하던 것을 이제 ‘갓길’이라고 하잖아요? 그 정도로 많이 사용해야 됩니다.” “물별은 유행어나 대체용어가 아니고 자연을 지칭하는 명사인데요?” “그래도 마찬가집니다” <일단 알려야/알아야 쓰게 될 것 아닌가? 쩝!> 하지만 모든 일은 순리에 따라야 하는 법.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게 순리이려니. 인터넷 검색어에서 물별을 쳤더니 몇 개의 물별이 떴다. 다행스럽게도 실뿌리가 생긴 것이다. 내 살아생전 국어사전에 찍힌 물별을 볼 수 있을까. 다른 별의 물별이 된 후에도 나는 이 행성의 눈부신 물별들을 궁금해 할 것이다. 물별이 언어의 바다로 헤엄쳐 나가도록 밀어준 문우들에게 새봄과 더불어 고마움을 전한다.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메워져버린 고향집 우물, 그때 그 마을 사람들, 황금빛 달, 부모님… 우물 밑에서 아버지가 올라올 때까지 조마조마 슬펐던 나 자신도 안녕… 그리고 물별에 대한 댓글은 물론 ‘자유선언‘7)이라는 자작시를 블로
그에 띄워 물별을 옹호해주신 나석중 시인께 감사드린다. ’자유선언‘을 여기 옮기며 오늘의 글을 맺고자한다. 독자의 사랑과 관심을 희구하는 물별과 함께.
자유선언/나석중
아늑한 삶 다가오지 마라
강퍅하고 메마른 회오리 맞이해다오
어설픈 그리움아 더 멀리 있어다오, 사라져다오
외로움도 더 깊은 먹구름 펼쳐다오
한 번은 있어 봤느냐
토막난 행복아, 애타던 사랑아, 안녕히 떠나다오
맵고 쓰린 이별아 거침없이 들이닥쳐라
오! 피 먹은 자유야
반짝이는 물별같이 죽음마저 기뻐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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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매보다 강한 잎』62쪽(2006, 천년의시작)
2) 같은 책 77쪽
3)『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35쪽(1988,혜진서관)
4) 필자의 시집『그리워서』 53쪽 (1988, 명문당)
5) 필자의 시집『이 화려한 침묵』34쪽 (1993, 명문당)
6)『현대시』2004-7월호. 63~65쪽
7) blog.daum.net/suseokaucion/844060
*<리토피아> 2007-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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