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2019-4월호_ 권두언>
탈 그리고 페르소나
하청호/ 아동문학가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절한 탈을 쓴다. 그러기에 일찍이 칸트(Kant)는 그의 인간학에서 "사람은 문명이 진보할수록 점점 배우가 되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진실의 눈에는 아무도 그것을 사실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작위의 몸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몸짓이 진실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그와 같은 탈을 쓰고 볼 때이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감히 양반 등 지배계급을 비꼬지 못했지만, 탈을 쓰면 마음껏 조롱의 대상인 그들을 비웃을 수 있었다. 탈은 서민들에게 한바탕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마당이었다.
수년 전에 아이들과 종이죽으로 탈 만들기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개구쟁이들 몇몇이 탈을 만든 후, 미처 칠이 마르지 않은 탈을 쓰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희화戱化적인 춤을 추었다. 어떤 아이는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덩더쿵 덩더쿵.
아이들은 그 가락이 우리의 옛 선인들이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한숨을 토해 내던 소리인 줄을, 그 몸짓이 눌린 마음을 덜어내는 것인 줄 모르고 있다. 굳이 알려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서럽고 한스러운 유산을 반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오늘날 횡행하는 위선과 가식의 탈보다는 차라리 예스런 탈 속에 숨 쉬고 있는 탈의 본질적인 정신을 올바르게 얘기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탈이 서민에게 해방구였다면 현대인의 페르소나는 가식적이다. 일종의 가면을 쓰고 집단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 규범, 역할을 수행한다. 자신의 인격 위에 덧씌워지는 사회적 인격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관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아마도 '만남'과 '스침'의 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주라드(Jourard)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두 가지 측면의 '자기'를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또는 참된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꾸며진 자기 또는 가면을 쓴 '체'하는 자기이다. 우리가 말하는 만남의 관계는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네가 서로 만나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말하고, 스침의 관계란 나 자신의 가면暇面과 너의 가면이 만나서 정력과 시간을 쏟는 페르소나이다. 우리는 오늘날 첨단 IT시대에 직면하면서 만남의 관계를 잃어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사회, 문화적인 변화가 기존의 가치관과 인간다움을 변질시키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만남을 포기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가면적인 '스침'의 관계에 익숙해져 있다. 즉 가면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이 없어지면 서로의 관계도 단절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사회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가면을 벗은 참다운 역할 수행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대할 때 페르소나가 아닌 존엄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만남이 인간 상실, 인간소외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탈춤은 서민에게 그동안 쌓인 울분과 서러움을 토하는 해방의 한마당이었다. 탈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조롱의 대상 역시 알고 있다. 모두 공개된 사람이며, 공개된 장소에서의 조롱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페르소나는 가면 뒤에 숨어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정제되지 않은 말을 퍼붓고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은 사람의 가치를 혼란시키고, 특정인을 말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참으로 침묵이 그리운 시대이다. 고려 말 나옹 선사는 시詩를 통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하고 읊었다.
인도의 간디(Gandhi)도 월요일 하루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침묵을 했다 한다. 그는 문밖에서 아무리 급한 일로 야단을 쳐도 절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픔과 분노, 기쁨 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떠들기 시작한다. 그럴 경우에 말이란 위안도 되고 기분 전환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떠들고 있을 때 깊은 생각은 거의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깊은 생각은 소리치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깊은 성찰 없이 드러내 떠들기도 한다. 반면에 진리를 지녔으면서도 침묵하는 사람도 있다. 참된 말이란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침묵으로 머무는 것이다.
페르소나로 말을 하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배웠지만 침묵은 신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침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며 최고의 언어이다. 분명히 침묵은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길이며, 깊은 명상에 이르게 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에 대한 조사도 흥미롭다. 우리가 업무를 위한 말을 제외한 일상적인 말 중에서 하지 않아도 될 말, 남을 비방하는 말, 감정이 과잉 노출된 말이 반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쓰는 말 중에서 반을 버려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나는 버리고 남은 빈자리에 가면을 벗고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말로 채워 넣었으면 한다. 외부의 소리가 차단된 빈방에 잠시라도 혼자 앉아있어 보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4월이다. 지난날 젊은이들의 피와 외침의 달이다. 가면 속에 숨은 온갖 말의 성찬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지만 나라 사랑의 순정한 결기로 새로운 기틀을 다진 달이다.
일찍이 플라톤(Platon)은 '권력과 명예와 부를 한 사람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패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정의 사회란 사회 구성원 하나 하나가 권력과 부와 명예의 세 그룹 중 어느 그룹에 들어갈지 머뭇거리는 사회라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권력을 가지면 그 권력을 이용하여 명예나 부를 가지려 하고, 명예를 가지면 부와 권력을 가지려 한다. 이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며, 말의 성찬을 늘어놓는다. 옛 지배계급인 양반들은 탈을 통해 서민들의 애환과 신산한 삶을 수용, 이해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거짓되고 왜곡된 시선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탈과 페르소나! 4월의 순정한 젊은이들의 용기와 결기를 기억할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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