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아돌하』를 내면서>
의미 찾기, 또는 만들기
임승빈/ 본지 주간
감상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작가의 의도, 또는 작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작품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곧 감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작품을 통해 작가는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작품은 작가가 독자에게 그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리고 감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작가의 메시지( 의미, 느낌, 이미지 등)를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바람직한 감상의 결과는 결코 다양할 수가 없다. 독자의 감상은 그 어떻게든 작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고, 작품을 통한 독자의 감상과 사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즉,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집어넣는 것이고, 감상은 독자가 그런 의미만을 작품 속에서 찾아내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품을 이루는 각 요소들의 결합양태에 의해서 스스로 생성되고 발현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요소들을 선택하고 결합하는 것은 작가이므로 그렇게 스스로 발현되는 의미 또한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일 수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강제한 상황이 아니므로 독자의 개별적이고 실재적인 상황이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개입될 수 있다. 독자의 상상과 사유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다. 때문에 독자는 작가가 작품 속에 집어넣은 의도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스스로 그 구조를 통해 발현하고 있는 의미를 독자 자신의 개별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작품에 대한 바람직한 감상의 결과는 다양할 수 있고, 작품 또한 열린 구조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는 원인이고, 작품은 결과라고 말한다. 작품이 원인이고 독자는 결과하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언젠가 나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만든 것이 아니라, 파우스트가 괴테를 만들었다.'는 부르스터 기셀린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다. 작품은 작가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감상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수용미학의 입장 또한 소개한 적이 있다.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은 독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끝없이 새로운 질문일 뿐이라는 소설가 이청준과 한강의 견해를 소개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많은 작가들은 그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 어떤 의도나 확정된 의미를 작품 속에 집어넣고자 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다시 새로운 상상과 사유로 스스로를 갱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독자에게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작품을 독자적獨自的 존재存在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한 전달傳達의 도구道具로 전락시킨다.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나, 작가가 그 작품 속에 쑤셔 넣은 의미만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 작품을 통해 이 세계에 대해 스스로 의문하지 않고, 작가의 대답만을 듣고자 한다. 스스로 상상하고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작가와는 별개로 그 작품의 구조가 스스로 발현하는 의미를 자신의 개별적 상황과 결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은 대답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질문이다. 뿐만 아니라 감상은 작품 속에 들어있는 이미 고정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닌, 독자 스스로의 상상과 사유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창조적인 감상인 것이다. ▩
-------------------
*『딩아돌하』 2019-봄호 <『딩아돌하』를 내면서』>전문
* 임승빈/ 본지 주간
'권두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현승_『계간 파란』2019년 봄호 권두 에세이(발췌) (0) | 2019.05.08 |
|---|---|
| 탈 그리고 페르소나/ 하청호 (0) | 2019.04.28 |
| 내 조국의 상처로 인해 나는 작가가 되었다/ 바오 닌, 메도루마 슌, 방현석 (0) | 2019.02.28 |
| 장석원_『계간 파란』2018-겨울호 권두 에세이(발췌)/ 누가 언어의 주인인가: 시 대 힙합 (0) | 2019.02.15 |
| 홍신선_『월간문학』600호 축하 메시지/ 이 나라 문학의 지남(指南)이길 바란다 (0) | 2019.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