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장석원_『계간 파란』2018-겨울호 권두 에세이(발췌)/ 누가 언어의 주인인가: 시 대 힙합

검지 정숙자 2019. 2. 15. 01:31

 

<권두 에세이>

 

 『계간 파란 2018년 겨울호       힙합

 

 

  누가 언어의 주인인가: 시 대 힙합(발췌)

 

   장석원

 

 

  무엇 때문에 우리는 힙합을 말하려고 하는가. 시의 위기를 말하기 위해서인가. 힙합이 대세이기 때문에 유행에 편승하기 위해서인가. 우리가 힙합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힙합은 음악이 아니다. 힙합은 시도 아니다. 힙합은 노래도 아니다. 힙합은 반주가 있는 구술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힙합은 누가 만드는가. 힙합의 래퍼가 가수인가. 아니다. 래퍼가 음악가인가. 아니다. 질문에 답해 본다. 래퍼는 가수이다. 래퍼는 음악가이다. 래퍼는 작사가이다. 맞는 말이다. 한 가지만 다르다. 래퍼는 작사가이다. 맞는 말이다. 한 가지만 다르다. 래퍼는 시인이 아니다. 현 단계, 대한민국의 래퍼들은 시인이 아니다. 그들이 시인이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래퍼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시인이란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힙합의 가사가 시를 위협하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현 상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우리의 답이다. 노래의 가사(liric)는 음악을 떼어 내도 시가 될 수 있다. 시가 노래의 가사로 사용된 예도 많다. 힙합의 가사인 랩은 가사나 서정시(liric)가 될 수 없다.

  랩과 시는 엄연히 다른 장르이다. 그 둘은 매우 비슷하지만 염색체가 같지 않다. 시를 낭송할 때 배경에 음악을 사용한다고 한들 힙합의 음악과 성질이 비슷한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시는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 소리 내지 않고 읽는다. 시에 필연적인 것은 소리가 아니다. 시는 종이 위에 기록된 텍스트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시를 묵독한다. 시는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힙합의 가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음악에 맞춰 발화하는 것이다. 그것도 음악에 맞춰 래핑하는 것이다.('발화'와 '래핑'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무엇일까. '읊조리다'가 있고,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단어는 시조를 창(唱)하는 선비들에게나 어울리는 것 같다. '부르다'는 노래가 아닌 힙합이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단어이다. '중얼거리다'는 의미의 폭이 너무 협소하다. 구연(口演)은 구술과 뜻이 비슷하다. 적당한 번역어를 찾기 어렵다. 랩의 특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시에서 리듬이라고 말하는 것이, 힙합에서는 라임플로우로 쪼개진다. 힙합의 리듬은 박자나 템포와 유사할 것이다. 힙합의 리듬은 음악 요소이다. 힙합의 언어들은 시의 그것과 유사성을 나누어 갖지만, 시의 리듬이 힙합의 라임과 플로우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시에는 분명히 리듬이 있다. 힙합에서 리듬은 음악에 할양되는 것이고, 패퍼의 언어는 시의 리듬이 아니라, 라임과 플로우로 발화의 운동성을 표현한다. 래퍼의 목소리와 비트가 결합되는 랩의 발화가 시인의 낭송과 같을 수는 없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낭송할 때 래퍼의 그것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시인의 유려한 낭송을 보고, 라임과 플로우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들썩이고 팔을 내저으며, '푸쳐핸접'을 외치지는 않는다. 그 순간은  어디까지나 음악이 주인공이다.

  래퍼의 구술 증에서 우리가 공연장에서 알아듣고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랩은 다시 들을 때, 그 가사가 텍스트로 고정될 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시각화될 때, 비로소 읽힌다. 온전히 이해의 장으로 들어온다. 시는 낭송의 대상이지만 시인이 낭송 무대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독자가 그 무대 앞의 관객이 되는 경우는 힙합만큼 많지 않다. 시는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조용히 읽는 것이다. 이 차이는 두 장르의 결정적 분기점이다. 시에는 음악이 없고, 힙합에는 음악이 있다. 랩을 입으로 말하고 공연하는 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다시 말하겠다. 랩의 텍스트는 시가 아니다. 랩은 언어와 음악, 두 가지가 있어야 존재한다. 시는 음악 없이도 존재한다. 랩의 라임이 동질감과 이질감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서 비롯된다. 시에도 라임 같은 것이 있지만, 랩처럼 강박적 현상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시에도 라임 '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은 '프로조디(prosodie)'라고 부른다. 시의 프로조디 현상, 통사와 프로조디의 통합 관계에 대한 개념과 사례 분석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것. 장석원, 「백석 시의 리듬-「고야」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36호, 2013.4;「김수영 시의 통사와 리듬」, 『국제어문』77집, 2018.6;「백석 시의 통사와 리듬」, 『인하대 한국학 연구』51집, 2018.11.)

  영어로 제작되는 랩은 영어의 언어적 특성을 전제로 한다. 한국의 랩은 한국어의 특성을 기반으로 할 것인데, 한국어의 특성은 무엇인지, 래퍼들은 얼마나 공부하고 고민했을까. 왜 영어와 한국어를 뒤죽박죽 뭉개 놓을까. 한국어의 통사적 특성, 한국어 음운론, 한국어 속 한자어, 한국어 문법 등등. 어미와 조사가 문법과 의미를 조성하는 한국어 문장에서 각운이 무한 반복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의미와 관계 없이 자동 반복 재생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결어미 '-다'에서 라임을 느끼지 않는다. 어미와 의존명사, 조사와 의존명사가 형태가 같을 때, 분명히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통해 그 품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시각적인 분절로 표기해야 할 때…… 모국어가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순간, 정말로 그 모든 규칙을 너무나 잘 알고 있냐고 물어본다. 자유자재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네이티브 스피커'로 우리는 정말로 자동적으로 등록되었는가. 시인과 래퍼들은 전부 이런 고민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답을 찾았다는 오만을 경계하면서, 작품 하나하나를 쓸 때마다, 사건을 통과한다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경우를 경험으로 치환하면서, 하나하나 배워 가는 것 아닌가. 언어에 대한 염결한 태도 없이 언어를 마구 휘두르고 조각내고 궤멸시키는 것이 언어예술의 권한인가. 아니라면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듣든 말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점을 살펴보자. 시는 잘 팔리지 않지만 힙합은 소수에게 엄청난 부를 몰아준다. 시는 백일장이라는 사멸 직전의 오래된 경연 대회 형식을 갖고 있다. 힙합은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1등을 뽑아내는 국민 참여 형식의 오디션이 되었다. 시를 낭송할 때 춤을 추는 경우는 드물지만, 힙합은 라이브 무대가 열릴 경우 래퍼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들썩들썩 춤을 춘다. 힙합에는 영어가 많이 사용되지만, 시는 그러한 예가 많지 않다. 힙합은 대중에게, 특히, 10-20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그들에게 시는 교육기관에서 억지로 주입하는 낡아 빠지고 구린 텍스트일 뿐이다. 표층의 차이는 확연하다. 심층의 차이는 무엇일까. 힙합과 시는 다르다. 같을 수 없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그 차이를 인정한 후에야 우리는 힙합과 시의 다른 점을 본격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힙합이 대중에게, 그것도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세계관을 대변할 수 있는 유력한 장르로 인식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힙합은 나쁘다, 저질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 애들 망한다. 그것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악마의 검은 설교이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는 락큰롤에도 이런 말을 쏟아부었다.) 힙합은 그들의 형식이고 정체성이다. 힙합은 음악과 구술의 혼합 장르로서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지닌 예술 형식이다. 힙합의 경계는 없다. 음악도 아니고 구술문학도 아니라는 사실이, 그 중간적 특성이 힙합의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힙합 앞에는 장애물이 없다. 힙합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힙합은 팡타그뤼엘(Pantagruel)이다.

  힙합이라는 진공청소기가 남겨 둔 것이 시이다. 아니, 시만이 힙합에 빨려들지 않을 것이다. 힙합의 가사가 언어로 표현된다는 점, 그것이 리듬을 지닌다는 점, 그것이 주체에게 전권을 부여한 1인칭 독백 형식으로, 시처럼, 발화된다는 점. 이러한 특징들의 인식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그것을 언어의 특징이라고 선언한다. 랩과 시의 공통 영역에 언어가 놓여 있다. 텍스트의 길이, 창작 주체, 향유 대상 등등과 무관하게 시와 랩은 언어예술이라는 공동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시와 랩의 재료인 언어의 본질을 되새긴다.(p. 3~8.)

 

  시와 힙합 사이에는 분명 친연성이 존재한다.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둘이 예술이 되지 못할 때가 많다. 복사기에서 출력되는 듯한 감상으로 얼룩진 서정시들, 비슷한 세대의 비슷한 언어로 표준 형식이 되어 버린 긴 산문시 안에 유사한 정서와 소재들을 반복하는 겉만 모던한 시들, 시를 사회과학이나 철학 이론으로 이해하고 있는 일부 '시인-평론가' 공생 그룹들……. 힙합은 어떤가. 디스와 스웩으로 오염된 폭력적 언어의 상품 소비 경진 대회 출품작들 아닌가. 욕 배틀에 불과한 언어 폭격 아닌가. 무질서한 시와 오염된 랩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시와 랩이 서로게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우리가 힙합을 주제로 '이슈'의 장을 마련한 까닭이다. 시와 힙합의 리듬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예술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지식과 윤리를 받아들이는 데에서 예술 단계로 진입하는 한국 힙합의 첫걸음이 시작될 것이다.(p. 13~14.)

 

  계간 파란 편집 주간 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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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2018-겨울호 <권두 essay>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