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내 조국의 상처로 인해 나는 작가가 되었다/ 바오 닌, 메도루마 슌, 방현석

검지 정숙자 2019. 2. 28. 02:54

 

<권두대담>

 

    "내 조국의 상처로 인해 나는 작가가 되었다"

     _남북 정상회담을 함께 지켜본 아시아 작가의 정담

 

     바오 닌, 메도루마 슌, 방현석

 

 

 

  지난 4월 27일(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인 '4.27 판문점 선언'을 평화의 집에서 발표했다. 같은 날 바오 닌 작가와 일본의 메도루마 슌, 그리고 한국의 방현석 작가가 '4·3항쟁 70주년'을 맞은 제주에서 실황중계되는 남북정상회담을 함께 지켜보았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바라보면서 아시아 작가들의, 문학적 해석과 연대에 관한 담소를 이곳에 옮긴다.

 

 

방현석: 오늘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세계가 생중계한 역사적인 광경을 지켜보고 난 저녁에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처를 공유한 베트남과 한국, 오키나와의 작가들이 만났습니다. 바오 닌 선생은 전장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고 살아남았는데, 살아남게 한 하늘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바오 닌: 이렇게 술 마시라고(웃음) 살아서 기억을 간직하고, 그것을 기록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몰랐는데 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는 영광스러운 승전군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내 가슴에는 전쟁이 남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 슬픔, 내 개인과 내 조국의 상처로 인해 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입은 상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방현석: 바오 닌 선생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군대에 입대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원으로 복무했습니다. 얼마 동안 전쟁을 한 것인가요? 

 

바오 닌: 네, 열일곱 살이던 1969년에 입대해서 1975년까지 만 6년 동안 참 많은 전투에 참여했지요. 제가 군인으로 치른 전쟁은 6년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는 1945년부터 1975년까지 30년 동안 전쟁의 불구덩이에 갇혀 있었습니다. 1858년 프랑스의 침략부터 계산하면 130년 동안 침략 전쟁을 겪었습니다.

 

방현석: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을 넘겨받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지만 다시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다음에 미국과 싸웠지요. 언젠가 바오 닌 선생이 베트남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떤선넛국제공항 전투에 대해 제게 했던 얘기가 기억납니다. 남베트남 공수부대와 벌인 그 전투에 바오 닌 선생도 참가했고, 그 전투와 함께 전쟁이 끝났을 때 소대원은 두 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끔찍한 전쟁을 끝내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항 대합실에 누워 길고 깊은 잠에 빠졌다고.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에서 희생자가 얼마나 되었나요?

 

바오 닌: 미국은 전쟁에서 입은 자신들의 인명피해를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5만8천 명 사망, 3만5천 명 부상. 그러나 우리나라는 인명피해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었습니다. 대략 3백5십만에서 4백만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지요.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총 4천5백만 명 저도였으니까 열 명 중의 한 명쯤 죽은 거죠. 그리고 미국의 사망자는 대부분 전투원이었지만 베트남의 사망자 대부분은 양민들이었습니다.

  

방현석: 전쟁이 끝난 뒤 유해발굴단으로 활동했는데 전쟁에서 잃은 동료들의 유해는 다 찾았는지요?

 

바오 닌: 격전지를 찾아다니며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전투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직도 수습하여 안장해주지 못한 채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군인들만 30만 명입니다. 내 소설은 그들의 무덤입니다. 

 

방현석: 메도루마 슌 선생은 왜 작가가 되려고 했는지요?

 

메도루마 슌: 직업적인 작가가 되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소설을 쓰려고 했습니다. 작가가 되어 밥을 먹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학창시절에 뛰어난 작품을 읽고 소설이 쓰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무터 습작을 했지만 지금도 작가라는 직업으로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소설을 계속 쓴다는 자체가 제게는 중요합니다.

 

방현석: 메도루마 선생은 우리《아시아》의 발행인 이대환 작가와 편집위원이던 방민호 평론가가 오키나와로 찾아갔을 때 자신을 일본 작가가 아니라 오키나와 작가로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류큐국琉球國이었던 오키나와와의 독립적 지위와 역사성을 강조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러하신지요?

 

메도루마 슌: 물론입니다.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에 병합되기 전까지 류큐국이라는 독립국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도 외교권을 가지고 미국, 프랑스 네델란드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일본에 강제 병홥된 후 우리는 정치, 경제는 물론 언어와 생활 습관까지 일본과 동화될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방현석: 일본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가 되었던 우리나라나 아시아 다른 나라의 국민이 가졌던 분노가 지금도 남아있는 감정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메도루마 슌: 오키나와 사람인 내 조부모는 1920년대 오사카에서 일했고 아버지도 오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으로 돈 벌러 간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렸지요. 식당 문 앞에 '류큐인, 조선인 사절'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고 제가 어릴 적에 조부모님이 얘기해주셨어요.

  

방현석: 그래서인가요? 선생은 일본에서는 인커뷰할 때도 선글라스를 잘 벗지 않던데 오늘은 벗고 계십니다.(웃음) 

 

메도루마 슌: 제주도의 햇빛은 부드럽습니다.(웃음) 오키나와는 햇빛이 너무 강렬하지요. 

 

방현석: 오에 겐자부로 선생과 대담하면서도 선글라스를 안 벗었던데요?

 

메도루마 슌: 오에 겐자부로 선생은 제가 존경하는 분이지요. 그런 것을 신경 쓸 정도로 작은 사람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일본은 연장자와 맞담배도 아무렇지 않기도 합니다.

 

방현석: 한국을 비롯한 외국의 초청에 잘 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주도에 오기로 했는지요?

 

메도루마 슌: 한국에 올 기회가 많았지만 관광이나 단순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광주와 제주의 의미 있는 자리에는 오고 싶었습니다. 제주도의 4.3을 다룬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가 '문학계'에 연재될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홍기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일대가 바로『화산도』의 무대입니다.

 

방현석: 오키나와와 제주도는 본토에서 벌어진 갈등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는 친근성이 클 것 같습니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이면서 일본이 벌인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오키나와 인들이 10만 명 넘게 희생되었지요?

 

메도루마 슌: 네.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시작한 상륙작전은 3개월간 계속되었습니다. 양국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20만 명 중에서 12만 명이 죄 없는 오키나와인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 네 명 중의 한 명이 죽은 셈이지요.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에 의해서도 죽었지만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일본군에게 식량을 빼앗기고 참호 밖으로 쫓겨난 주민들은 굶주린 채 미군들의 포격을 받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주민들에게도 미군의 포로가 되지 말고 자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지금도 '군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방현석: 작가로서 일본 본토에서도 충분히 대우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헤노코의 미군기지 확장공사 반대 활동에 참여하고, 직접 카누를 타고 나가 감시 활동을 벌이고 계십니다. 다시 오키나와가 일본 때문에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메도루마 슌: 헤노코 반전평화운동에 참가하는 활동가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10년 넘게 카누를 함께 타는 동지들도 소수입니다. 그래서 제가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습니다. 제 성격 탓이겠지만, 동지들을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작품 활동만을 하고 살 수는 없어요. 시간만 주어진다면 지금이라도 장편소설을 쓸 자신이 있지만 헤노코를 뒤로 하고 그럴 수는 없어요. 1995년 미군 병사들에 의한 12세 소녀 집단 성폭행 사건은 제가 이 운동에서 물러설 수 없게 했어요. 그런 비극이 반복되게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요. 가족들의 영향 탓도 있을 거예요.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두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섰고, 전 구분들을 보며 자랐어요. 

 

방현석: 1995년에 있었던 오키나와 소녀 성폭행 사건와 그에 항의한 오키나와인들의 투쟁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서 받는 불이익은 없는지요?

 

메도루마 슌: 같은 일을 오키나와에서 하면 도쿄의 절반 정도 수입을 얻습니다. 나는 고료를 많이 주는 곳의 청탁을 받지 못합니다. 편집다와 발행인들이 우익의 위협 때문에 나에게 청탁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바오 닌: 미군들을 일상으로 보게 되나요?

 

메도루마 슌: 물론입니다. 다카에 숲에서 항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 바로 앞에서 위장복을 입은 미군병사들이 훈련을 합니다. 그들은 어딘가로 파견되어 누군가를 표적으로 총을 쏘겠지요. 그들이 오키나와에서 훈련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오키나와가 아시아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합니다. 

 

방현석: 오키나와의 투쟁은 미국과 일본, 두 강국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길고, 험난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메도루마 슌: 오키나와는 일본이 벌인 전쟁의 나쁜 결과를 다 떠안고 있습니다. 일본 패전 73년이 지난 현재, 일본 전체 미군시설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군과 자위대가 강화되는 것을 방치하다, 오키나와가 미국과 일본이 벌이는 군사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면 관광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의 경제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가 어렵습니다.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미군과 자위대의 기지 강화를 저지하기 위해 끈질기게 싸워야 합니다.  

 

방현석: 메도루마 선생은 일장기에 대한 경례, 기미가요가 나올 때 일어서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그 운동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메도루마 슌: 2천 년대 초반까지 교사로 일했고, 학생과 교사들이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거부하는 둥동에 대한 공격은 교원노조의 힘으로 방어해올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지만 오키나와에서 고등학교는 전체가, 중학교에서는 반 정도가 거부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는 더 적습니다.

  

방현석: 계속해서 싸우는 것에 지치지 않나요?

 

메도루마 슌투쟁은 목숨을 걸고 하면 안 됩니다. 일 년 365일 할 수 있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방현석: 그렇게 치열하게 현실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어떻게 그토록 높은 미학적 엄격성을 소설에서 유지하는지 경이롭습니다. 단편「혼 불어넣기」「투계」「브라질 할아버지의 술」등은 정말 매혹적입니다. 단편 미학의 전범과 같습니다. 소설집『혼 불어넣기』가 한국에 처음 번역 출판된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우리 '아시아'는 선생님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메도루마 슌: 과찬입니다.

 

방현석: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뤘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바오 닌: 글쎄, 사는 사람이 좋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좋은 게 아니라 무섭다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을 짜증스럽게 만드는 제도라면 왕 밑에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지요.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단지 승리에 관한 이야기만 쓸 뿐, 문학이 실패와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회피하고 있는 것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쟁 때보다 더 어려운 생활상을 외면하고 우리는 전쟁 승리에 너무 오래 도취한 채 오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방현석: 베트남은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응해서 '도이 머이' 정책을 통해 신속하게 개혁 개방에 나서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 아닌가요?

 

바오 닌: 도이 머이는 큰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성과가 두드러졌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을 해결하면서 인민의 삶을 크게 개선했습니다.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운신의 폭이 생겼습니다. 검열이 완화되고 출판이 쉬워졌지요. 예전에는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응웬 후이 티엡, 팜 티 호아 등이 진취적인 작품을 내놓은 것도 이 시점이었습니다.

 

방현석: 그래도 참전군인 출신으로 가만히 있으면 전쟁영웅인데 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느냐고, 주변에서 묻지 않나요?

 

바오 닌: 그래서 작가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라고 살려놓은 것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메도루마 슌: 서구 작품만 주로 읽다가 바오 닌의 소설『전쟁의 슬픔』을 읽고 많이 놀라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소설을 읽고 베트남의 전사들이 투쟁한 현장과 생활한 지하 땅굴에 가보고  싶었는데 가보지 못했어요. 이번에 바오 닌을 마난나서 아주 기쁩니다. 바오 닌을 비롯한 베트남의 작품을 더 읽고 싶지만 번역된 것이 많지 않습니다.

 

바오 닌: 우리 베트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아의 작품을 잘 몰라요. 바로 우리 이웃 나라인 라오스, 캄보디아에 어떤 작가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나라의 문학을 알려면 여기《아시아》문학지를 만드는 벙현석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미국, 프랑스, 영국 역사는 아는데 라오스 캄보디아 역사를 모르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아시아가 아시아를 무시하는 거지요. 아, 일본과 중국은 좀 알지요.(웃음)

 

메도루마 슌: 일본과 오키나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베트남, 한국, 타이완 등 아시아 나라들의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에 비에 미국과 유럽의 영화와 문학은 지나치게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 B29전투기가 오키나와에 출격했습니다. 베트남전에서 죽은 미군의 시체를 오키나와에서 씻어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우린 그걸 보고 자랐지요. 그런데 우린 정작 베트남을 모릅니다.  

 

방현석: 1991년 베트남에서 출간된 장편소설『전쟁의 슬픔』은 1994년 랜덤하우스에서 영어판을 영국과 미국, 호주에서 출판했습니다. 그 뒤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네델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고요. 이 작품으로 바오 닌 선생은 영국의 인디펜던트 문학상, 한국의 심훈문학대상을 받았습니다. 세계로 하여금 베트남을 새롭게 이해하고, 전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베트남 내에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요?

 

바오 닌: 전쟁은 비극입니다. 특히 베트남전쟁은 그렇지요. 이겼다고 해도 비극은 사라지지 않고 상처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전쟁을 아름답게 그리거나 전쟁을 칭송하고 과장하여 그린다면 전쟁의 실체를 외면하는 것이고, 베트남 사람과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전쟁의 슬픔』을 신인이던 1987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1990년에 끝냈습니다. 독자들과 베트남 작가협회는 지지를 보냈지만, 국가의 언론기관을 통해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을 구분하지 않고, 항전에서 보여준 베트남인들의 용기와 영웅성은 거의 다루지 않은 반면 상처와 상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이 다루었다는 거였지요. 저만이 아니라 저를 옹호했던 작가협회 지도위원회와 제게 '작가협회 최고상'을 주었던 심사위원들까지 무거운 비판을 받았지요.

 

방현석: 그래도 시간은 『전쟁의 슬픔』편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다시 출간되었도, 비판도 잦아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베트남 문학과 사회도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고요.『전쟁의 슬픔』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오 닌: 전쟁을 치른 우리 세대는 전쟁의 교훈과 고통스러운 경험을 뼛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값비싼 교훈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데『전쟁의 슬픔』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의 문학은 전쟁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제가 전쟁에 대해 쓰는 것은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에 대해 쓰는 것은 평화에 대한 사랑을, 삶에 대한 사랑을, 사람과 사람들 간의 연민의 정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방현석: 전쟁과 평화를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을 통해 종전선언과 북미수교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베트남이 미국과 수교하고 나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바오 닌: 베트남은 미국도 싫지만, 중국도 싫어합니다. 미국이 없으면 중국이 우리의 주권을 위협할 것이란 생각이 일반적입니다. 1979년 중국과의 국경전쟁 경험을 베트남은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베트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한반도에서는 전쟁 위험을 제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전쟁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침략전쟁에 나선 군인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선한 전쟁이란 없고 전쟁터에서 황혜해지지 않는 군인이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메도루마 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오키나와로  돌아온 많은 미군들이 정신병에 시달리고, 마약에 빠졌고, 범죄를 저질렀어요. 베트남전쟁에 가지 않고 미국으로 소환되기 위해 일부러 사전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달러에 이름을 써 술집에 붙이는 게 기지촌의 한 문화가 되었습니다.

 

방현석: 판문점회담을 시발점으로 남북이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고, 상호 공존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 통일 후의 과정을 돌아볼 때 한반도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해 어떤 문제게 주목해야 할까요?

 

바오 닌: 적대 교육과 적대 문화입니다. 분단과 대결의 기간 동안 서로를 용인할 수 없는 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갑자기 함께 살기고 했다고 해서 그 교육과 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통합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나는 밥보다 담배가 좋습니다. 남부의 적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더군요.(웃음)

 

방현석: 이런 위험한 작가들에 대한 활동 제한은 없나요?(웃음) 

 

바오 닌: 내게? 없어요.

 

하재홍: 하면 할수록 책이 더 잘 팔릴 테니까요.(웃음)

 

메도루마 슌: 사실 바오 닌이 온다고  해서 제가 제주도에 왔습니다. 꼭 우리 오키나와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여기 친구들도 함께 오세요.

 

곽형덕: 제가 10년 동안 메도루마 슌을 보아왔지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듣습니다.

 

바오 닌: 네. 우리 베트남에도 꼭 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물론 술도 사주지요.(웃음)

 

방현석: 세계가 판문점을 주목한 오늘 제주도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베트남과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두 분 작가와 함께 참으로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배석자 : 조용호  곽형덕  하재홍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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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ASIA』 2018-가을호 <바오 닌, 메도루마 슌, 방현석남북정상회담을 함께 지켜본 아시아 작가의 정담>에서 

* 블로그주 : 영역본은 책에서 일독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