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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 2018년 겨울호- 힙합(발췌)

검지 정숙자 2019. 2. 15. 13:38

 

 

계간 파란 2018- 겨울호         힙합

 

  issue 힙합

 

 

 누가 언어를 망가뜨리는가: 무서운 힙합(발췌) / 김성재 · 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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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재: 힙합 뮤지션// 나의 가사는 시가 아니다. 내 몸 안에 있던 시적인 사유는 시가 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가사가 된다. 일부러 운율을 거스르는 단어를 집어넣을 때도 있지만, 보통 나는 유려한 운율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힙합/랩'이라는 특정 장르의 가사를 쓰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이 불가피하다. 만들어진 다소 작위적인 운율은 곧 그것이 작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운율 자체를 배신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사가 쓰이기도 전에 존재하던 생래적인 운율을 배신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더욱 철저히 그것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유려함을 좇지 않고 운율을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의 시적인 사유는 그것이 시적이므로 곧 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나의 시적인 사유는 가사가 되어야만 구체적인 밀도를 가진다. 밀도를 가지는 순간 나의 시적인 사유, 그것이 품고 있던 시라는 것이 푹 꺼져 버린다.나의 가사가 시에 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의 가사는 시가 아니지만, 여전히 시적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낸 가사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이시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보다 더 시적인 가사, 언젠가 시가 될 내 가사가 마침내 어느 날, 기어코, 시가 된다면, 내 가사는 더 이상 랩이 될 수 없을 것이다. (p. 21-22.) (…………) 시인은 시를, 나는 랩을 하면 된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왔다. 여전히 내가 쓰는 가사가 시이기를 열망한다는 사실이 울린다. 그래, 나는 시가 가진 '정돈된 고요'를 원한다. 소리 지르지 않고 소리를 지를 줄 아는 힘을 원한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지른다. 소리 지르고 있어도 소리를 지르고 싶다. 음악을 틀고 목소리를 내어 운율을 만들어 본다. 랩 가사를 읊고 있자니 소리만 남은 몸이 되어 간다. 일본풍 현악기 소스가 곁들여진 미국인 프로듀서의 비트가 울린다.(p. 27.)

 

  2

  장석원: 2002년《대한매일신문》신춘문예로 시 부문 등단, 시집『아나키스트』『태양의 연대기』『역진화의 시작』『리듬』// 힙합의 주제 중 하나가 '디스'임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동부와 서부 래퍼들이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래퍼들끼리 서로를 공격하는 것,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자기 소모적인 디스 전쟁의 총구를 우리가 살고 있는 공포스러운 '이 세계'로 돌리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표적이 될 것이다. 그들이 말한다. 너나 해라, 쉽쉐야, 그냥 사냥개처럼 동료들의 목을 물고 늘어질래 질래. 힙합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이치이, 약육가앙식. 승자도옥식. 이렇게 그들이 말할 것 같아서 뒤통수가 서늘해진다.(p. 39.)  (…………) 더불어(미국 힙합의: 인용자) 가사의 수준은 낮아졌다. 실제로 가사적인 미학을 일컫는 리리시즘(Lyricism)의 부재가 심각해진 현실은 미국의 힙합 매체들도 종종 지적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소재를 감싸는 큰 주제는 자기과시, 일명 스웨그(swag )와 남성성 과시다. 그리고 이 같은 미국 힙합 가사의 경향은 최근의 한국 힙합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2017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장르의 발생을 비롯한 미국 래퍼들이 놓인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한국 래퍼들의 가사에서 마약이나 총기 소재의 가사를 보긴 어렵다. 그러나 큰 틀에서의 논조와 표현 방식 및 수위는 미국 힙합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다. 단지 몇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자기과시와 이를 통해 자연스레 결부된 디스성 가사만이 주를 이룰 뿐이다. 일례로 한국 래퍼들의 가사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Bitch'라든가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표현들, 그리고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여성을 끌어들이는 '네 여자 친구도 나에게 반했지' 류의 가사가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 스윙스가 이끄는 레이블 저스트 소속의 래퍼 블랙넛이 「Too Real」이란 곡을 통해 여성 래퍼 키디비(KittiB)를 성적으로 모욕한 사건은 현재 한국 힙합의 가사가 안은 심각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중략) 또한 은연중에 한국 힙합 가사 일부에 깊숙이 침투한 '일베식' 표현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전 세계에서 미국 힙합의 경향을 별다른 필터링 없이 받아들여 재현하는 것에 집착하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인기를 얻는 것은 한국 힙합 신이 유일하다시피하다. 좋게 이야기해서 트렌드의 적극적인 반영이요, 좀 더 솔직히 평하자면 맹목적인 흉내 내기 수준이 더욱 심화된 상태다. 결국 한국 힙합 가사의 수준이 올라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로컬라이징이다. 그동안 한국 힙합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다양한 주제의 부재와 한영 혼용 논란 역시 이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강일권, 「힙합의 주연 가사, 저항과 비판인가? 디스와 센 척인가?」, 강일권 권석정 차우진 덩덕현 모신정 공저『뉴미디어와 콘텐츠의 결합, 대중문화 트렌드 2018』, 마리북스, 2018, pp. 73-77.) (p. 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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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가야 할 '우리'라는 길(발췌) / 이병국

 

  이병국: 2013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등단,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이곳의 안녕』// 힙합은 1970년대 가난과 폭력,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미국의 사회적 약자들 특히 흑인들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저항 정신을 표출하기 위해 개척한 음악 장르이다.(1967년 자메이카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ce)가 1973년 여름, 웨스턴 브롱크스의 한 파티에서 두 개의 턴테이블을 활용해 즉석에서 새로운 루프 버전을 탄생시킨 것으로 힙합은 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1970년대 브롱크스 지역의 인종차별과 이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힙합 문화를 탄생시켰고 이후 힙합은 어떠한 전개 양상을 나타냈는지에 관해서 참조할 만한 글로 제프 창 저, 유영희 역『힙합의 역사-멈출 수 없는 질주』, 음악세계, 2014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힙합은 미국과 달리 인종차별이나 사회적 약자의 발화 양식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선진 음악 문화의 한 부분으로 수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한국에서 최초로 힙합 랩 곡으로 간주되는 곡은 1989년 발표된 홍서범의 「김삿갓」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랩은 리듬을 근간으로 하는 발화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홍서법의「김삿갓」은 한국 최초의 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힙합의 대중화라고 할 때, 그 기원은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등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글로는 김영대 외 저, 『한국힙합- 열정의 발자취』, 한울, 2008이 있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힙합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는 하층계급의 분노와 저항 문화가 아닌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트렌디한 음악으로 소비된 측면이 크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국 힙합은 온라인과 언어드라운드 중심으로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것의 발화 도구인 언어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2018년 한국의 힙합씬은 어떠한가. 한국에서 힙함은 더 이상 비주류 음악이 아니다. 거대 자본이 뛰어들 만큼 힙합은 상업적으로 유용한 산업이 되었다. 이는 다른 말로 나플라의 인터뷰에서처럼 힙합 뮤지션들이 살아남으려면 거대 자본이 만들어 놓은 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힙합 뮤지션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힙합 문화에서 통용되는 허슬(Hustle)은 분투하는 삶을 뜻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실히 노력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허슬인 셈이다. 이에 기반하여 힙합 뮤지션은 셀프메이드(self-made)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는 역경을 딛고 성공한 자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의 주된 소재로 돈과 차, 여자 등이 랩 가사에 차용된다. 흔히 힙합 음악이 속된 말로 '자뻑', '잘난 체'하는 가사를 쓰는 것이 그 이유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노력해서 그에 걸맞은 부와 명예를 쟁취했다는 것이야말로 힙합 뮤지션에게는 자신의 음악이 진정성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소외되고 억압당한 존재의 성공 신화를 역설하는 것, 그것이 힙합 문화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저 나플라의 말처럼 돈을 벌기 위해 「쇼미더머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말은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힙합은 긍정적인, 희망의 음악 장르다 볼 수 있다.(p. 51-52.)  (…………) 최근 시 문학장에서는 거대 출판 자본에 저항하여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시도들이 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문예지의 발간이나, '파란' '걷는사람' '아침달' '모든시' 등 시인이 중심이 된 시집 출판이나 기존 시 전문 출판사의 리뉴얼 시집 출간 및 독립 출판 등이 그것이다. 아직 찻잔 속의 태풍처럼 고요한 움직임이기에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하ㅏ기에는 아직 미흡하지만 타자로 강제되지 않기 위한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응전이 지속될수록 시장은 풍성해지고 그것을 수행하는 존재의 진정성이 확보된다. 예술적 주체가 시장이 요구하는 바에 저항함으로써 얻게 되는 진정성은 예술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당위성과 결합함으로써 예술적 자긍심 즉 스웩을 표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소비하는 개인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표현할 뿐이다.(한병철 저, 이재영 역『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p.37.) 진정성이 갖는 다양성은 단독성의 아토포스(atopos)를 불가능하게 한다. 거대 자본은 헤테로토포스(heterotopos)적인 차이를 위해 소비되지 않는 아토포스를 제거하여 시스템에 대한 부정을 불가능하게 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강제한다. 그리고 이 강제의 규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임으로써 주체여야 하는 존재는 타자가 된다./ 예술은 가난해야 하고 사회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는 당위는 그것을 수행하는 예술가의 삶을 인질로 잡고 있다. 시인의 아토포스는 제거되고 유사한 타자들 중 하나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의 스웩이란 문학상을 받거나 다른 시인의 인정이 아니라면 자기만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거대 자본의 요구를 거부한 채 수행되는 독자 대중과의 연결 고리를 확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결국 '너와 나의 연결 고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 안의 소리'를 유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p.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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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힙합과 정신 치료(발췌) / 장창현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과 함께 힙합의 치유적 속성에 대한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다// 힙합을 치유에 활용하는 이안 레비(Lan Levy)의 이론을 나는 이미 경험했다. 시인 김승일(2007년『서정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프로메테우스』가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스포큰워드 단체 '말하는 오후'의 멤버이기도 하다)과 함께 2018년 3월부터 8달 동안 '힙합+시=치유'라는 제목으로 마음의 아픔이 있는 젊은이 () 들과 함께 힙합과 시를 이용한 치유의 시간을 매주 2시간씩 가진 것이 그것이다. 함께 힙합이나 시를 감상하고 느낌을 편안한 분위기에서 나누었다. 이 시간을 통해 어쩌면 진료실에서보다 더욱 깊게 그들의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내 고등학교 시절의 수치스러운 이야기조차 꺼낼 수 있게 되었다(이제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정신과 의사로서 진료실에서 항상 처음 오시는 분들께 건네는 말이 있다. '어떤 얘기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힙합에서도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 정신과 치료를 받지 못하는 정신과 의사도 말이다. 진료 현장에서 매번 느끼게 되는 건 언어를 통해 상대방을 만나기 전에는 그의 생각, 감정,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화될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의 삶과 만나는 것이다. 힙합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언어화된 너와 나의 삶이 만날 수 있다. 앞으론 이 작업을 확대하여 시인 김승일과 스포큰워드 아티스트 노원스페셜(no1soecial, 스포큰워드 아티스트. 본명은 박세준. 국내 최초로 1인 스포큰워드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믹스테이프 『쥬만지』를 발표했다. 현재 스포큰워드 소셜 클럽 '말하는 오후'를 운영하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래퍼 리튼 바이라이노('말하는 오후'의 멤버, 본명은 이창수. 100% 선교사이자 100% 래퍼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스포큰워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2017년 첫 번째 디지털 싱글 『21C 전도사 존재 선언문』을 발매했다.), 엠키('말하는 오후'의 멤버, 본명은 신희승. 래퍼이자 스포큰워드 아티스트이다. 최근 디지털 싱글 『VOICE』를 발매했다.)와 함께, 시, 스포큰워드를 활용한 치유와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2014년 겨울,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낭떠러지 길로 가는 것이라던 그의 충고보다 내 귀에 때려 박혀 마음을 울린 것은 프라이머리의 비트에 이센스가 랩을 했던 「독」이었다. 나를 구원했던 힙합을 이제 구원이 필요한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p. 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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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시'는 왜 '힙합'과 만나 '거리'로 나가려 하는가!/ 혁명적 예술 융합 보고서(발췌)_ 김승일

 

  김승일: 2007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프로메테우스』, 'be SPOKEN' 크루의 '말하는 오후' 팀에서 시(詩) 크리에이터 '프로킴'으로 활동 중이다.// 집단으로 괴롭힘을 당한 초등학생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 8층에서 투신했다. 나는 '투신'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극단적 절망감을 대리 체험했다. 그 단어가 주는 참혹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면 그런 선택을 하는가. 그런 일들이 한국 사회에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는 일상이 된 그런 현실에서 나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말 크게 울어서 누구라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여기 폭력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사는 나의 모습이 시가 되기를 염원하기 시작했다. 사랑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할까? 더 많이 끌어안고 더 많이 울면서 다가가는, 그래서 사랑으로 치유하는 복수가 정말 가능할까. '복수하는 것에는 결국 폭력이 수반된다.' 나는 그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고 지쳐 있었다. 그러나 복수가 사랑이라면, 사랑으로 충만한 복수라면 어떨까. 그 새로운 복수復讐가 수많은 사랑의 복수複數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신기하게도 딱 그때쯤 '랩'을 구사하는 정신과 전문의를 만났다. 그는 정신의이자 래퍼였다. 힙합의 정신으로 뭉쳐진 하나의 지성이었다. '그와 함께 실체를 만들어 나가자!'고 생각했다. 나를 온전히 보여 주니 그도 다가왔다. 그리고 그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경기도 성남의 '함께하는 사회적 협동조함' 안에서 이루어진 '힙합+시=치유'였다. 어떻게 힙힙이 함께할 수 있을까. 시와 힙합은 동류일까?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 사이에서 시와 힙합은 노래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결핍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자들에 의해 탄생하고 발전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그러모으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는 치유를 하는 자였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그가 폭력보다는 사랑과 치유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석원 시인을 통해 '락'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내 시의 '형태'와 '리듬'이 처음으로 변화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내적 세계의 변화와 관계가 깊다. 내면으로 침입한 '새로운 리듬'은, 어떤 항상성에 기반을 둔 삶의 관성적 리듬을 (살짝) 비틀어 방향을 바꾼다. 실로 대단한 힘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의 리듬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힘을 갖고 있다면, 분명 누군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밖눈 것도 가능해진다.("학교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자살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이수연 기자, 「학교 폭력이 자살 위험성 높여" 청소년기 '실행' 빨리 개입 서둘러야」, KBS 뉴스, 2018. 11. 25.) 오즘의 현실이 이렇기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에, 자살 위험성에 놓인 청소년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예술적 운동'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폭력에 저항한다고 끝없이 외치고 있는 한 명의 시인으로써 말이다.) (p. 91-92.) (…………) 나는 문학 특강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형 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집 이외의, 대부분의 시집은, 상업적 · 기술적 특수 효과의 원조 없이 (대중 ·  예술 · 문화) 시장이라는 싸움터에 나간다. 시집은 음반처럼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BGM이 없다. 그러므로 시라는 것은 문학적으로 뛰어나야만 하는 것 아닌가.' 시는 오로지 문자 안에서 창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 느낌적인 느낌들을) 다 담아내야 한다. 말 그대로 언어와의 정면 승부이다. 어쩌면 시는 힙합이 만들어 내고 표현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에너지를 언어라는 한정된 질그릇 속에서만 힘껏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음지에 있는 좋은 시'가 어떤 장르보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 있어 보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신기로운 감각과 리듬들을 발견해 낸다. 그 마른 종잇장 위에서 셀 수 없는 감동(감정)이 일어난다. 이것이야말로 거의 언어로만 할 있는 인간 예술이 아닌가. (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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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18-겨울호 <issue 힙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