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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특이점과 문학적 존재론(발췌)/ 이진경

검지 정숙자 2019. 2. 16. 12:30

 

 

    존재론적 특이점과 문학적 존재론

    - 문학에서 존재론적 사유의 두 가지 길

 

    이진경

 

 

  1. 특이점이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갖는다. 인간에겐 인간의 세계가 있고, 동물에겐 동물의 세계가, 식물에겐 식물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는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며, 동물의 세계나 식물의 세계 또한 동물이나 식물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다. 인간들에 의해 가축이나 '팻'이 되거나 동물원에 갇혀 지내는 것 말고는 생존할 길이 없는 지금 동물의 세계가 어떻게 동물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며, 인간의 경제학적 계산에 따라 베어지거나 선별되어 재배되는 작금의 식물의 세계가 어찌 인간이나 동물 없이 식물들만의 세계로  존재할 것인가? 반대로 인간 없는 사람들만의 세계도  있을 수 있다. 자기장은 전자기력을 갖는 사물들로 이루어지며 거기 끼어들어 특이성을 바꿀 힘이 없다면 아무리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인간이든 돌멩이든 그 세계 안에 있다 할 수 없다. 반면 전기를 이용해 강력한 자기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 자기들의 세계에 특이점이 되어 끼어들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그 세계는 다른 세계로 변환되어 재탄생한다.(p. 263.) 

 

  2. 특이점의 존재론

  새로운 존재자의 존재는 그와 상응하는 새로운 세계를 존재하게 한다. 그렇게 탄생한 세계의 특이성이, 그의 존재로 인해 변화된 특이성의 정도와 양상이 어떤 존재자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결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존재자의 존재 의미는 그 존재자나 그 인근의 누군가가 그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 존재자의 존재로 인해, 혹은 그 존재의 사라짐(부재)으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의 특이성이다. 어떤 존재자의 존재로 인해 산출된 세계의 변화, 혹은 그로 인해 출현한 어떤 세계의 존재, 그것이 바로 어떤 존재자의 '존재 의미'다. 이는 세계가 부여한 규정성을 넘어서는 미규정성의 힘이 새로이 창조한 세계다. 존재자의 규정성과 미규정적 존재가 '통일'되어 창조한 존재자의 존재 의미다. 그렇다면 특이점의 존재론에 고유한 윤리적 함축을 칸트식 어법을 빌어 이렇게 적으면 어떨까? '언제나 세계의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 단 좋은 특이성을 형성하는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p. 267.)

 

  3. 문학적 세계와 특이점들

  어떤 인물이나 사물이 중요한지 아닌지, 혹은 그에 부여하려 한 중요성이 텍스트상에서 구현되었는지 아닌지는 그가 이런 특이점으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갖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중요한 인물이지만 특이점이 되지 못하면, 그의 존재로 인해 세계가 달라지는 양상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성공했다 하기 어렵다. 인물의 중요성은 작가의의도가 부여한 위상이 아니라 작품 안의 세계 속에서 그의 존재가 갖는 힘과 양상인 것이다. 역으로 어떤 장소나 인물을 특이점으로 만들 때에는 그로 인해 수립될 세계가 어떤 특이성을 갖게 될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인물이 작품에서 특이점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그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p. 272.)

 

  4. 존재론적 문학과 특이점

  플라톤이 지금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2000년 전 그리스인 플라톤과 같은 인물일 리 없고, 맑스가 지금 되돌아온다면 그 또한 증기기관차를 타고 오는 게 아니라 인공지능을 장착한 핸드폰을 들고 되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살았던 세계가 부여한 규정성에서 벗어나 지금 세계, 다른 세계의 규정성 속으로 들어오면서 되돌아온다. 다른 규정성이 된 특이성으로서, 다른 규정성의 특이점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되돌아오는 것은 규정성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다. 다른 규정성을 갖게 된 미규정적 특이점이다. 이전에도 특이한 세계를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양상의 특이한 세계를 만들어 내며 되돌아오는 것, 그것은 바로 그들의 존재, 그 존재의 힘이다. (p. 283.)

 

  5. 배신의 존재론과 '보이지 않는 인간'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복종하는 척하는 것은 상대를 속이는 것이란 점에서 배신이 분명하다.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면 더욱 싫어하는 백인들 앞에서 흑인이 살아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기도 하니 불가피한 배신인 셈이다.(p. 285.)  배신이란 근본에서 보면 세계와 존재자가 서로를 등지는 것이다. 존재자가 세계를 등지고, 세계가 존재자를 등지는 것이다. 전자는 존재자가 속한 세계가 그 존재자에게 부여하고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규정성에서 존재자가 벗어나는 것이다. 세계가 그 존재자에세 보내는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계는 그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각자에게 특정한 자리를 할당하고 거기서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를, 때로는 생을 바칠 '운명'마저 분배한다. 그것이 세계가 그 안의 존재자들에게 부과하는 규정성이다.(p. 288.)

 

  6. 존재의 어둠 속으로

  개체성이 소멸하는 순간, 존재자 인근에 모여든 대상들은 중심을 잃고 흩어지며, 그 인근에 형성된 감응의 대기는 주인을 잃고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주인공이나 특이적인 중심인물의 죽음 이후에 소설은 대개 그 죽음 이후에 남은 것만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개체성을 넘어 존재 자체로, 그 존재 자체를 따라가는 운동을 쓰는 것은 그래서 더욱 어렵다. 무규정적 존재 자체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둠 속에서 사는, 개체성을 넘어서 있기에 마치 유령같이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프롤로그가 시도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반복되는 배신의 서사의 끝에서 도달한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존재자의 개체성을 넘어선 존재야말로 개체적 존재자의 '기원'이라고 믿기 때문일 터이다.(p. 300.)

 

  7. 세계 옆의 세계와 세계 밖의 어둠

  존재 자체가 세계 바깥의 무규정적 어둠이라면, 존재자의 존재는 세계 안에서의 미규정적 어둠이다. 세계와 짝하는 자로서의 존재자는 모두 주어진 세계와 상관적인 규정성을 갖는다. 동시에 그 세계 안에 있지만 그 규정성으로 회수되지 않는 잠재성으로서의 미규정성을 갖는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낼 규정 가능성이다. 존재자의 존재 의미는 현행의 세계가 갖는 특이성을 뜻하지만, 또한 현행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그의 존재로 인해 출현할 가능성을 뜻하기도 한다. 존재자란 현행적인 규정성과 동시에 그와 다른 세계를 향한 잠재적 미규정성을 갖는다. 현행의 세계와 다른 세계로 가는 출구가 바로 존재자의 존재다.(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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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18-겨울호 <criticism>에서

  * 이진경/ 저서『철학과 굴뚝청소부』『히치하이커의 철학 여행』『노마디즘』『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수학의 몽상』『필로시네마』『삶을 위한 철학 수어』『파격의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