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백飛白과의 만남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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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스승은 정지용과 서정주다. 이렇게 말하면,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하겠다. 한국현대시에서 이들의 시는 영원불멸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으니까 꼭 나만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억지춘향이다.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눈썰미로 숨어있는 스승을 찾아낸 것처럼 말하는 것도 꼴불견이지 싶다.
정지용은 내가 대학원 다닐 때 석사논문으로 쓴 시인이다. 1970년 그 당시에는 정지용은 일반 독자는 물론 대학에서도 금기의 대상이어서 아무나 손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시인이었다. 우연히 인사동 고서점에서 구한 그의 시집을 읽고 나서 나는 정말 놀랐다. 이토록 탁월한 시인을 장막 속에 숨겨놓고 나머지 3류들이 한국현대시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가짜 교육을 자행해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나는 분연히 그의 작품을 학위논문으로 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의 시는 물론 산문도 하나같이 우리 현대문학의 수준을 드높이 끌어올린 것이어서 그를 제외하고는 한국현대문학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도 사회가 삼엄하던 시절이라 일이 잘못되면 크게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이판사판 할테면 해보라는 뚝심으로 논문을 썼다. 1971년에 나온 나의 논문 「지용시 연구」는 정지용을 다룬 최초의 학위논문이 되었다. 내로라하는 대학교수들도 겁을 먹고 손을 못 댄 정지용을 햇병아리 국문학도가 대학원 졸업논문으로 써냈으니 참 엉뚱한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갓 등단한 젊은 시인이었지만 선배 시인들의 작품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시도 아닌 것을 시랍시고 써내는 시단의 풍경을 보면서 뭐 이따위 시인들이 시인 행세를 하고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시집을 펴내는가 통탄스러웠다.
대학원을 졸업 후 육사 교수부 교관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1974년 봄 수도여사대 전임이 되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화엄사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대웅전 앞에서 고색창연한 석등과 석탑을 보고 있는데 아주 약한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불더니 지푸라기와 낙엽이 팽그르르 날아오르다가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절이 다 그렇겠지만 화엄사도 앞만 좀 트였고 좌우와 배면으로는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ㄹ과 ㅁ모양으로 배치되어있는 사찰의 건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이리 막히고 저리 막혀서 바람이 불면 그것이 곧잘 회오리바람으로 불기 십상이지만, 그래봐야 바람이 건물에 부딪치면서 자연히 기세가 꺾이는 것이었다.
회오리바람이 제 힘에 겨워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나는 문득 정지용의 시 「구성동九城洞」에 나오는 "절터드랬는데/ 바람도 모히지 않고"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폐사지의 고적한 풍경을 노래한 시인의 시선이 아주 실감나게 느껴졌다. 대웅전도 석탑도 없는 폐허에는 바람도 "모히지" 않는다. '불지 않는다'가 아니라 '모이지 않는다'이다. 그러니 그 고적감과 적막감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이다. 이게 시다. 이게 시인이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 순간 정지용의 시는 내 마빡에 시의 벼락을 내리쳤던 것이다. 대학원에서 그의 시를 읽고 분석할 때는 몰랐던 시의 비의가 새삼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학에서 시와 소설을 강의할 때나 원고지 앞에서 만년필로 붓방아 찧을 때도 「춘설春雪」이나 「백록담白鹿潭」같은 작품은 나에게 수시로 시의 벼락을 내려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대학원에서 정지용을 읽고 논문을 쓴 일이야말로 참으로 평생 동안 벼락맞을 짓을 미리 한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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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을 알기 전에는 우리나라에 시인은 딱 서정주 하나뿐인 줄 알았다. 그만큼 서정주는 누가 뭐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일제말 친일행각? 맞다. 군사정권 찬양한 멍청이? 맞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그의 시적 고백 그대로 대지주인 인촌 집안의 마름 아들? 맞다. 중앙중학 다닐 때 퇴학을 당한 동맹휴학 주동자? 맞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을 넘나드는 변증법적 평가는 다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내가 오래전에 쓴 "당신은 왕겨빛 그리움이죠?/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맞죠?"라는 어리광 떠는 어조가 물씬 풍기는 「미당을 위하여」라는 시를 본 네티즌들은, 어? 오탁번이가 친일파를 왜 옹호하지? 하는 말도 한다. 그 말도 다 맞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고칠 생각이 없다.
그의 「추천사」에 나오는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라는 구절이 지닌, 하늘과 땅이 순간적으로 일치되는 시적 변용의 찰나를 보라. 하늘에 산호나 섬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어찌하여 시인은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곡예사가 손수건을 펴면 순간적으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 같은 행위를 막무가내로 하고 있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시인이여, 그대는 그만 붓을 내려놓으시게나. 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의 허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시시콜콜 글로 그 까닭을 다 쓰기는 좀 성가신 일이니까, 궁금한 시인 있으면 따로 연락하기 바란다. 한잔 술에 곁들여서 횡설수설로 풀어내야 이런 말은 감칠맛이 난다. 또 그의 「상가수上歌手의 소리」에 나오는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을 흔들기도 하고 하늘이 비치는 똥오줌독을 보면서 염발질을 하는 상가수의 이미지 하나만으로라도 그의 부끄러운 헛발질은 다 사면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이미지야말로 한국현대시의 금자탑 맨 꼭대기에 있는, 하늘의 뜻과 언제나 통신하는 보석 안테나인 것이다.
정지용과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운 숨결 앞에 언제나 무릎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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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도 더 전의 이야기를 한다면,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병아리 시인이었던 나의 눈에는 시인 같은 시인이 하나도 안 보였다. 그때 나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까 젊음의 치기 같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른바 정통을 이어가는 서정시인들은 음풍농월의 낡은 말장난을 즐기고 있었고 또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놓고 반응하는 시인들은 시간이 지나면 몽땅 사라지는 대자보 같은 격문을 시랍시고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보다는 소설이나 역사책을 더 많이 읽으면서 시단과는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고 『현대시』동인지에나 시를 이따금 발표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 쓴 나의 시 가운데 「굴뚝소제부」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 시"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러한 당돌한 표현을 했을까 싶다. 아마도 이러한 당돌함이 내 시의식의 원천인 것 같다. 나의 제9시집 『시집보내다』(문학수첩, 2014)의 첫 머리에 실린 「비백飛白」이라는 시에서 이 구절을 시창작의 모티브로 삼은 적이 있다.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싱그의 드라마을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47년 전에 쓴 「굴뚝소제부」의 첫 머리다
간밤에 잣눈 내리고
아침 수은주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
만년필촉의 비유를 쓴
젊은 날의 내가
나 같지 않다
맘대로 해도
법을 안 어기는
뉘엿뉘엿 어스름에
지팡이 그림자만
산 넘어간다
이냥저냥
희끗희끗
비백체飛白体로 몸을 떠는 소나무가
춥다
-전문, 시집『시집보내다』「비백 飛白」, 문학수첩. 2014.
지용과 미당은 내 시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비백飛白이었다. 지용과 미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성긴 붓끝 사이 희끗희끗한 여백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내 시세계의 암사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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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반시』 2019-봄호 <기획 2 |내 시의 스승>에서
* 오탁번/ 1966년《동아일보》(동화), 1967년《중앙일보》(시), 1969년《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손님』『우리동네』등, 창작집『오탁번 소설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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