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술잔을 쥐여줘야 해/ 이길원

검지 정숙자 2019. 2. 6. 22:41

 

 

    술잔을 쥐여줘야 해      저녁놀 스러지듯 떠난 장만영 선생님

  

    이길원 시인

 

 

  장만영(1914-1975, 61세)선생님은 시집을 낼 때마다 시집 제호를 한 자씩 늘려 가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첫 번째 시집은 『양羊』, 두 번째 시집은 『축제』, 세 번째『유년송』, 네 번째『밤의 서정』, 다섯 번째『저녁 종소리』, 여섯 번째『달. 포도. 잎사귀』, 일곱 번째『놀 따라 등불 따라』, 그리고 여덟 번째 마지막으로 『저녁놀 스러지듯이』를 출간 이후 타계하셨다.

  사춘기 호기심 많던 중학생 때로 생각한다. 장만영 선생님의 「사랑」이라는 시에 반했다.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생기면 들려주려 노트에 적어 놓기도 했었다.

 

  서울 어느 뒷골목

  번지 없는 주소엔들 어떠랴

  조그만 방이나 하나 얻고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숨바꼭질하던

  어린 적 그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꼬옥 꼭 숨어 산들 어떠랴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단 한 사람

  찾아주는 이 없은들 어떠랴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가난한 우리 들창을 비춰줄 게다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깊은 산  바위틈

  둥지 속의 산비둘기처럼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의지하며

  순아 우리 단둘이 사자.

    -장만영, 「사랑」전문

 

 

  이 아름다운 시를 최헌이란 가수가 경박하게 만들어 흥겹게 불렀을 때, 대중가요에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사랑 가득한 아름다운 시를 이렇게 부르다니." 역정을 내며 대중가요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저녁놀 스러지듯이』를 출간한 1975년, 나는 장만영 선생님께 <명시의 고향> 취재를 의뢰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을 취재하는 일이니 얼마나 즐거운가. 선생님은 이미 건강이 안 좋으신 상태였다. 그러나『주부생활』취재에는 꼭 응해야 한다 하시며 동행해 주셨다. 고향도 황해도이고 또 멀리 갈 수도 없다 하시니, 「김포들」이라는 시를 골랐다. 그 당시 김포는 곡창 지대로 넓은 들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서정주 선생님을 취재하며 밤새 술 마시던 이야기를 하였다. 장만영 선생님은 빙긋 웃으시며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황해도 연백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난 장만영 선생님은 부호인 아버지가 경영하던 배천온천호텔과 농장을 경영하며 서울에서 잡지사를 운영하셨다고 했다. 그때 많은 문우와 친교를 맺었었다. 신석정 · 박영희 · 최재서 · 오장환 · 김기림 · 정지용 · 서정주  등, 부인도 신석정 시인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부유하면서 사람 좋은 장만영 선생님은 가난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시인들에게 자진해 봉이 되었다. 그 당시 시인들 치고 선생의 신세를 안 진 사람이 없다 할 정도였다.

  술을 좋아하는 서정주 선생님과는 셀 수 없을 만큼 술자리를 같이했었다. 한번은 주사 심한 미당을 고향으로 보내자고 문우들과 억지로 열차를 태운 일도 있었다. 그 무렵에는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하차하면 여비를 거슬러 주었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탄 미당은 용산역에서 내려 거스름돈으로 늦도록 술을 마신 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잔뜩 취해 대문을 두드리며, "만영아, 만영아. 나 집에 안 갔다." 소리치고 있었다. 시인들 사이에서 늘 있던 일인지라 부인은 늦은 밤 다시 술상을 차려 냈다 한다.

  "미당에게는 술잔을 쥐여줘야 해."

  악의 없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표정에는 장난기까지 어려 있었다. 그런 미당이니 당연했을 거란 이야기이다. 장만영 선생님은 천성이 착한 분이셨다. 『주부생활』편집국에 같이 근무하다 《조선일보》편집국으로 옮긴 선생님의 장남 장석훈 형도 물색없이 착한 분이었다. 혈관에 선량함이 가득 묻어 있는 혈통인 듯하다.

  그 취재 두 달 후인 10월, 장만영 선생님은 타계하셨다. 생전 장만영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취재한 셈이다. 힘들어 하는 선생님을 모셔 삶을 재촉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아직도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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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2019-2월호 <목동살롱 38>에서